누구나 쉽게 생각하지만 함부로 선택하기 어려운 길. 바로 '소비자 운동'이다. 1970년대 말은 급속한 도시화·수입농산물 개방·외국산 의약품 등 사회가 급변하던 시기였다. 국내 소비자운동도 이 때 태동했다. 독재정권과 기업의 싸늘한 눈초리를 견디면서 '소비자 주권'을 외친지 30년. 김자혜(사진·63)소비자시민모임(이하 소시모)회장을 최근 소시모 서울사무소에서 만났다.
◆기업의 '봉' 안되려면…스스로 '소비자 주권' 챙겨야
"밖에서는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외쳤고, 학교 안에서는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여성학을 공부했어요. 전태일 열사의 사망과 급속한 산업화 등 끊임없이 제기되는 이슈를 경함하면서 '사회적 정의'에 자연스럽게 눈떴죠."
현장에 나와 처음 겪었던 산부인과 실태조사를 통해 기업의 '봉'일 수밖에 없는 소비자들의 현실을 목격했다. 김 회장은 그때를 '모유를 잃어버린 세대'로 회상했다. '분유를 먹여야 아이가 튼튼하게 자란다. 모유보다 분유가 더 좋다'는 사람들의 무의식은 기업의 리베이트 결과였다.
그는 "분유가 등장하면서 우량아 대회가 생겨났고, 당시 소비자들은 분유를 먹어야 아기가 건강해진다는 기업의 광고에 세뇌당했다"며 "병원과 기업이 결탁해 산모에게 무료로 분유를 제공했고, 엄마는 병원에서 처방받은 특정 분유를 아기에게 계속 먹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하루 25~30통의 상담전화를 처리하며 소비자운동의 밑바닥을 경험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평균 상담 100여 건을 처리해가면서 소비자 이슈에 완전히 민감해졌다. 소비자 운동에 집중하게 된 계기는 1996년 아파트 장기수선충당금 문제를 해결하면서부터다.
"수선충당금은 원래 집주인이 부담하는 돈인데 당시에는 세입자들이 내는 게 일반적이었죠. 세입자가 내더라도 전세만기가 되면 돌려받아야하는데 이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못 돌려받는 사례가 많았어요. 이걸 소시모가 처음 주장했죠. 지금은 집주인이 당연히 부담해야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어요. 소비자운동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소시모는 매년 축산물 브랜드 인증과 소비자리포트, 석유시장감시, 비교정보생산, 에너지위너상, 소비자 교육 및 캠페인 등 다양한 일을 진행한다.
가장 대표적인 활동은 비교정보 생산이다. 그동안 수입농산물, 보청기, 등산용품, 유모차, 블랙박스, 물티슈 등 다양한 제품의 품질을 검사하고 그 정보를 소비자들에게 제공해왔다. 이를 반영해 매월 발간하는 '소비자리포트'는 한국소비자원, 공정거래위원회 등에서 벤치마킹할 정도다.
김 회장은 "소비자들이 브랜드에 목매는 이유는 품질을 경험하지 않아도 '그 브랜드 정도면 괜찮을 것이다'라는 믿음 때문"이라며 "'브랜드가 과연 돈값을 할까'이런 기본적인 의문을 해소하고, 품질에 대한 정확한 정보전달이 소시모의 역할이라는 사명감에서 시작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고가의 브랜드 제품을 사지 말라고 강요하기 보다는 그 뒤에 숨겨진 허상을 알려줘야 한다"며 "광고를 할수록 소비는 촉진되고, 브랜드 가치가 광고파워에서 결정되는 현실에서 익숙한 대기업 제품 대신 중소기업 제품을 선택하길 강요할 순 없다"고 말했다.
광고파워가 아닌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품질경쟁을 통해 항상 '싼 게 비지떡'은 아니라는 것을 소비자 스스로 입증해야한다는 의미다.
최근에는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교통수단에 대한 소비자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김 회장은 "그동안 식품, 먹거리 안전성 확보에만 집중해왔는데 이번 사고로 정작 교통수단에 대한 안전성에는 미흡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선박 뿐 아니라 등 버스, 지하철 등 대중교통수단의 안전점검 평가, 감시 등에 소비자가 직접 나서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건설에 대한 소비자 강화운동 방안도 모색 중이다.
그는 "해양 선박 등 건축물에 대한 품질도 소비자가 알 권리가 있다"며 "식당, 단체급식소 등이 위생 점검을 하듯 건축물에도 기업과 정부기관이 아닌 제 3자가 감시활동을 벌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대마다 소비자 운동 트렌드도 변해
소비자 운동은 살아 숨쉬는 유기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때문에 각 시대별 주요 소비자운동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경제·사회적 흐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김 회장은 "80년대에는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산업사회에 필요한 가전제품 및 전자제품에 대한 불만이 증가했고, 90년대에는 수입농산물 개방과 외국산 의약품, 아파트 층간소음 문제가 소비자 운동을 주름잡았다"며 "2000년대에는 온라인·홈쇼핑 등 새로운 유통망이 생기면서 전자상거래에 관한 소비자 운동이 제기됐고, 최근에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금융안전에 대한 운동이 강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에는 소비자들이 현명해지면서 가치소비, 불매운동 등 소비자 운동을 자발적으로 형성하고 있다"며 "기성세대와 젊은층의 융합, 소비자 운동의 국제적 연대 등 시대적 흐름에 맞는 소시모의 새 역할에 책임감이 막중하다"고 했다.
김 회장은 젊은 세대가 없는 현재의 소비자 운동이 아쉽다고 했다.
그는 "기성세대가 해온 소비자 운동을 2030세대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줘야 하는데 세대 간의 갈등, 소통의 불협화음 등으로 젊은층이 소비자 운동으로 흘러들어오지 못한다"며 "소비자운동의 지나친 고령화를 탈피하고, 젊은 소비자들을 어떻게 운동에 몰입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새 과제"라고 말했다.
이어 "실제 모니터 요원 모집공고를 내면 20대는 커녕 30대도 전무하다"며 "소비자 운동이 배고프고 힘든 일이라는 인식이 있다 보니 요즘 사람들이 내 걸 양보하면서까지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러나 "말하지 않으면 사회와 정책, 법 등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며 "하나보다는 둘, 둘보다는 셋, 그보다는 사람들의 열망이 시민단체나 소비자 운동 등 각종 단체로 흡수돼야한다"고 말했다.
이어 "현장에서 뛰는 활동가들의 경제적 수준과 복지를 현실화하는 일은 내가 임기안에 해결해야할 어려운 숙제"라고 덧붙였다.
김 회장은 "'기업이 망한다'는 구실로 소비자 운동을 축소하고, 은폐하는게 기업 논리지만 달리 생각하면 소비자 운동 덕분에 기업 경쟁력이 생기기도 한다"며 "소비자들이 뭉치면 국내 기업이 세계 최고의 상품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기도 한다"고 역설했다.
소시모의 감시활동이 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킨 대표적인 예가 '에너지위너상'이다.
이 상은 1996년부터 소시모와 산업통상자원부가 공동 주최하는 상으로 친환경 및 에너지 효율 제품 생산과 소비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마련됐다.
그는 "세계가 공인하는 삼성의 AS기술, 에너지효율이 뛰어난 국산 가전 등은 처음에는 소비자 불만을 해결하기위해 시작된 거지만 결국 국내 기업의 수출 경쟁력을 이끌었다"며 "사회가 발전하고 시민의식이 성숙하면서 이제 소비자운동과 기업은 공생관계"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건강해야 일을 더 오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요즘 부쩍 몸에 신경쓴다.
그는 "하루 '1·10·100·1000·10000' 법칙을 늘 기억한다"며 "하루에 1번 웃고, 10명의 사람들을 만나고, 100마디의 글을 쓰고, 1000번을 들으며, 10000보 걷기를 하는 것이 행복하게 일하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