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로 대한민국 경제가 흔들리자 정부는 벤처를 찾았다. 고용을 창출할 수 있는 벤처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벤처기업 육성 특별법’도 당시에 제정됐다. 20여 년의 시간이 흘러 다시 경제 위기가 찾아왔다. 정부는 벤처로 눈을 돌려 재정 지원과 함께 ‘혁신성장’에 앞장서라고 떠밀고 있다. 벤처인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현장에서는 벤처 정책의 패러다임 변화가 선행돼야 한다며 입을 모았다.
◆ 18번째 벤처포럼, ‘시기적‧경제적’ 중요성
지난달 29일부터 2박 3일간 제주에서 진행된 ‘제18회 벤처썸머포럼’은 벤처업계의 현황을 논의하고, 벤처의 역할을 되돌아봤다는 점에서 지난 행사와 유사했다. 하지만 2018년의 대한민국은 ‘구조적 경제위기’를 겪고 있다는 점에서 올해 포럼이 갖는 의미는 여느 때와 달랐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7월 취업자 증가 수는 2010년 1월 이후 가장 부진하다. 투자지표는 5개월 연속 하락세고, 소득분배지표도 10년 만에 최악이다. 삼성전자의 뒤를 이을 세계적인 기업은 나오지 않고 있다. 네이버, 엔씨소프트, 카카오 등 IT벤처의 성공사례가 있지만, 세계적 기업 알리바바, 아마존 등과 비교하면 시가총액이 10분의1도 안 된다.
시기적 상황도 절묘했다. 포럼 개막식이 열린 이날은 소상공인들이 최저임금 인상에 반발해 서울 광화문에서 사상 첫 총궐기 대회를 개최한 날이었다. 벤처포럼 개회식에 참석한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도 총궐기가 열리는 날 포럼에 참석해도 되는지를 두고 고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한편에서는 소득주도성장이 삐걱대고 있는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중 최저임금 인상에 모든 이목이 쏠리면서 혁신성장, 공정경제 구호는 잊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한국형 혁신 생태계 조성해야 할 때"
올해 포럼에서 벤처인들이 주목한 부분은 크게 ‘벤처 정책 패러다임 전환’과 ‘혁신 생태계 조성’ 두 가지였다.
그동안 스타트업을 지원하기 위한 재정적 지원은 눈에 띄게 증가했다. 정부의 직접 지원을 포함해 모태펀드‧민간펀드 투자 등 창업할 수 있는 분위기는 조성됐다는 평가다.
김희진 유라이크코리아 대표는 “창업한 지 벌써 7년이 지났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창업 자금을 마련하기가 너무 어려웠다”며 “지금은 (청년들이) 창업을 할 수 있는 기반 정도는 마련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제는 벤처 지원 방향을 양에서 질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미 수만개의 벤처기업이 만들어져 있고, 이들을 더 잘 키워내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었다.
안건준 벤처기업협회장은 “한국에는 6만5000여개의 벤처기업이 있고, 스케일업을 목표하는 기업이 많은데, 이들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며 “창업이라는 씨를 뿌리는 것은 좋지만, 이미 심어져 있는 잔디가 더 잘 자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형 혁신 생태계 조성 또한 벤처 업계의 핵심 과제로 제시됐다. 대기업과 계열사가 지배하고 있는 경제상황 속에서 벤처기업이 대기업과 상생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장기적인 성장이 가능하다는 문제의식이었다. 벤처기업협회는 대기업을 설득해 갑을관계가 아닌 라운드 테이블에서 상생을 논의하자고 제안했고, 정부에는 민간 중심의 생태계 조성을 위한 지지를 요청했다.
안 회장은 “생태계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분위기 조성에만 8개월이 걸렸다”며 “내달 초 벤처기업과 대기업의 책임 있는 결정권자가 한 자리에 모여 한국형 혁신 생태계 조성을 논의하기 위한 협의체를 구성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공정경제
홍종학 장관은 포럼에 참석, “최저임금이 소득주도성장의 전부 인 듯 이야기 하면 안 된다. 한국 경제의 하향 추세를 돌리기 위해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라는 다른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며 정부 경제정책의 지지를 호소했다.
문제는 균형이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소득주도성장에 시그널을 줬지만, 혁신성장과 공정경제는 아직까지 구체화되지 않고 있다. 결국은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벤처를 만들어 낼 수 있느냐가 혁신성장과 공정경제, 더 나아가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의 성패를 가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포럼 강연자로 나선 한 인사는 “정부가 더 이상은 소득주도성장이나 뜬 구름 잡는 소리는 그만해야 한다”며 “이제는 구체적인 성과를 보여줘야 할 때다”고 뼈 있는 조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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