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수정의 여행 in] 가는 곳마다 문인 발자취…전남 장흥 '문학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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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수정 기자
입력 2020-02-24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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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사문학 효시 '관서별곡' 고장…예부터 문향으로 '문인' 대거 배출

  • 이청준과 한승원·한강 부녀 '유명'…천관산·득량만 듯 곳곳 '소설무대'

드론으로 촬영한 전남 장흥 한승원문학산책로 전경. [사진=기수정 기자]


전남에는 '여수에서는 돈 자랑 말고, 순천에서는 인물 자랑 말고, 벌교에서는 주먹 자랑 말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 하나 더, '장흥에서는 글 자랑 말라'는 얘기도 더한다. 장흥 출신 문인이 유독 많은 이곳은 '문향’(文鄕)의 고장'이라 불릴 만하다. 작가 눈에 비친 장흥 풍경은 더없이 새롭다. 작가가 특정 지역에서 보낸 시간, 그곳에서 얻은 영감과 위안은 책만큼 매혹적이다. 자연 속에서 문학을 이야기하고, 상상을 공유하며 어지러운 마음을 다독여본다.
 

조선 명종 때 문인 백광홍 가사집 '기봉집'. [사진=장흥군 제공]


◆가사문학 효시 '장흥'···문화관광특구 지정이유 있었네

'관서 명승지에 왕명으로 보내실제/ 행상을 다사리니 칼하나 뿐이로다/ 연소문 내달아 모화고개 넘어드니/ 귀심이 빠르거니 고향을 사념하라'(백광홍 관서별곡 中)

장흥은 소설가 이청준과 한승원을 비롯해 송기숙·이승우·위성관 등 내로라하는 국보급 문인을 배출해낸 곳이다.

2016년 '채식주의자'로 아시아 작가 최초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이 한승원 선생 딸인 것이 알려지면서 장흥은 더욱 주목받았다. 여러 연유로 2008년 국내 최초 '문학관광기행특구'로 지정된 장흥답게 문단 거목과 작품 속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나라 최초 기행가사 '관서별곡'을 쓴 백광홍(1522~1556)부터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조선 중기 이름난 시인이었던 기봉(岐峯) 백광홍은 이 작품에서 평안도 아름다움을 노래로 풀어냈고, 그 문학적 가치는 높게 평가됐다. 

관서별곡은 25년 후 가사문학 대가인 송강(松江) 정철이 '관동별곡'을 짓는 데 구성이나 표현 어구 배열까지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지만, 관동별곡에 비해 아는 이가 많지 않아 안타깝기만 하다. 
 

한승원문학산책로. 드넓게 펼쳐진 득량만. [사진=기수정 기자]


◆소설비 촉촉히 적신 장흥···천천히 걸으며 문학을 느끼다

한국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작가들. 그들이 살고, 작품 속에 녹여낸 아련한 발자취는 세월을 뛰어넘어 장흥땅 곳곳에 고스란히 남았다. 시인 곽재구가 장흥을 두고 "열애처럼 쏟아지는, 끈적한 소설비가 내리는 땅"이라고 비유한 것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소설 '눈길' 속 배경이자 이청준 생가가 있는 진목마을부터 한승원문학산책길, 천관산 문학공원까지···. 발걸음을 조금 늦춰 천천히 걸으며 사색에 잠겨본다. 천관산과 득량만을 비롯한 고장 속 산과 바다는 이청준 '눈길'과 '축제', 한승원이 쓴 '불의 딸'과 '그 바다 끓며 넘치며', 이승우 '일식에 대하여' 등에서도 생생하게 그려졌다. 

문학여행은 회진면 진목리 갯나들 마을에 자리한 이청준 묘소 앞 문학자리에서 시작한다. 넓적한 돌판 위에 너럭바위와 글 기둥이 사이좋게 섰다. 이청준 선생이 직접 그렸다는 돌판 위 문학지도도 눈길을 끈다.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니 '눈길'과 '선학동 나그네' 무대가 됐던 득량만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이청준 선생 생가 전경. [사진=기수정 기자]


◆이청준·한승원 작품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회진에는 고(故) 이청준 생가와 묘소가 자리한다. 작가 고향마을인 진목리는 소설 '눈길' 무대가, 회진에 이르는 선학동 길은 '선학동 나그네' 배경이 됐다.

임권택 감독은 소설 선학동 나그네를 영화에 녹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임 감독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다. 촬영도 이곳에서 했다. 마을 앞으로 펼쳐진 들판을 가로질러 바다를 막은 제방에는 영화 촬영 때 사용한 양철 건물이 들어서 있다. 제방에 서서 바라보는 산봉우리는 그 자체로도 학이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오르는 형국이다. 

진목마을에 자리한 생가 방안도 들여다본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 선생이 있고, 소설과 삶을 담은 액자들이 걸려 따스한 여운을 안긴다. 아담한 집 안에 놓인 사진과 유물, 마당 한쪽에 늘어선 장독대가 정겹다. 

고즈넉한 해변마을인 남포에는 소나무 몇 그루를 이고 있는 소등섬이 운치를 더한다. 정월 대보름날 당 제사를 모신다는 이곳은 썰물 때면 육지와 이어지는데, 달빛 아래 자태가 특히 아름답단다. 

안양면은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 생명력 넘치는 문학세계를 보여주는 한승원 문학 터전이다. 그는 율산마을에 '해산토굴'이라는 집필실을 마련한 후 끊임없는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여닫이해변 앞 한승원문학산책로도 필수코스다. '마르지 않는 문학 샘'이자 '창작 고향'인 바다를 따라 한 선생 글이 새겨진 비석이 줄줄이 이어진다. 

제방 북쪽은 회진포구다. 한승원 소설 '불의 딸'에서 주인공이 의붓아버지를 만나러 갈 때 지났던 포구와 바다가 한눈에 펼쳐진다. 다시 북쪽으로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이청준 소설 '축제' 배경지이자 영화 촬영지인 남포항이 모습을 드러낸다. 해가 뜰 때 마을 앞 조그만 소등섬과 바다가 이루는 풍광은 감동 그 자체다. 

이외에도 장흥 전역에는 문학적 향기가 깊게 배어 있다. 장흥 출신 문인들이 써 내려간 소설과 시를 읽고 장흥 땅을 밟는 순간, 곳곳에 펼쳐진 산과 들과 바다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글이 되어 가슴속에 박힌다. 

◆어머니처럼 넉넉한 품 천관산, 문학이 꿈틀대는 그곳

작가에게 산은 영감을 얻는 대상이라고 했던가. 장흥에는 천관산을 비롯해 제암산·사자산·억불산 등 명산 4곳이 자리하고 있다. 이 중 작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산은 바로 천관산이다. 산자락이 품은 기암괴석 모양새가 '왕관' 같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

문인들은 천관산을 '큰 산'이라고도 부른다. 힘들 때마다 어머니처럼 품을 넉넉하게 열어 보듬어주는 덕이리라. 정상인 연대봉에 오르면 다도해가 한눈에 펼쳐진다. 날씨만 도와주면 한라산도 볼 수 있다. 

이곳 천관산에도 문학이 꿈틀댄다. 산 중턱 탑산사 아래 문학공원에는 이청준과 박범신, 양귀자 등 여러 문인 글을 바위에 새긴 후 비석으로 층층이 세웠다. 작가들 육필 원고와 메시지를 담은 15m 높이 문탑이 명물로 꼽힌다.

공원 아래에는 장흥 출신 문인들 작품을 전시한 천관문학관이 자리한다. 작품을 한눈에 담는 것 외에도 다양한 전통 문화체험에 참여할 수 있다. 예약만 하면 누구나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편안한 집필활동을 위한 작가 전용 집필공간도 마련됐다.
 

전남 장흥 천관문학관 전경. [사진=기수정 기자]

고(故) 이청준 생가에 전시된 작품과 사진. [사진=기수정 기자]
 

임권택 감독 영화 '천년학' 촬영지. [사진=기수정 기자]
 

전남 장흥 한승원문학산책로. [사진=기수정 기자]
 

해질녘 한승원 문학산책로. [사진=기수정 기자]
 

한승원 선생. [사진=장흥군 제공]
 

'선학동 나그네' 저자 고(故) 이청준 선생[사진=장흥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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