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이 저물고 2022년 새해로 접어들대면서 대선 판은 더 뜨거워지고 있다. 3월 대통령선거 날까지 70일도 남지 않았다. 각 후보 대선캠프는 정책 공약을 마련하느라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필자의 눈에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외교·안보 공약이다. 전공이 국제정치학이다 보니 외교·안보 공약에 유독 눈이 갈 수밖에 없다. 아직 최종 공약집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결론을 내리기에는 이른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현재까지 언급된 이슈들을 보면 긍적적인 평가를 내리긴 힘들다. 그들은 급변하는 세계 정세에서 파생되는 현안들을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21세기 20년대를 일컬어 미·중 전략 경쟁 시대인 동시에 4차 산업혁명 시기라고 한다. 4차 산업혁명만으로도 세계 경제와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뀔 양상이다. 더욱이 미국과 중국이라는 양대 강국이 펼치는 첨예한 전략 경쟁은 세계 경제와 산업 패러다임의 전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혁은 당연히 우리의 시장과 경제활동 및 삶의 유형(pattern)에도 본질적인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대선 후보의 외교·안보 공약 이슈는 북핵 문제, 남북 관계, 대북 관계, 미·중·일·러 등 주변 4강과의 관계 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30년 이상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상도 바뀌었고 우리도 변했고 주변국도 변했다.
오늘날 우리의 외교·안보에 대한 시각은 다시금 단골 메뉴인 핵문제, 대북 관계, 대미, 대중, 대러, 대일 관계에 갇혀 있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안보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북한 핵개발이 진척을 이루고 핵무기의 완성도가 향상됨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선 때마다 각 진영이 꺼내든 외교 전략은 늘 대동소이했다. 진보 진영은 대화와 협력, 비핵화 유도를 위한 제재 완화 등을 강조한다. 보수 진영은 한미 동맹의 억지력 강화와 대화와 압박의 병행을 주장한다. 변한 게 없다. 아니, 우리만 안 변했다. 반면 주변국의 전략은 변해왔다.
대미 관계도 마찬가지다. 언제까지 한미 동맹 강화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 70년 동안 미국과 동맹을 유지해왔는데 더 강화할 필요가 있는가. 왜 우리만 미국의 신뢰와 믿음을 확보하지 않았다고 보수 진영은 믿고 있는가. 진보 정권이 동맹의 자주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를 훼손해왔다는 것이 단골 주제다. 그래서 복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럼 진보 정권에 반문해야 한다. 동맹의 자주성을 위해 우리가 얻는 것이 뭐고 잃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봤는지를 말이다. 단지 미국에 종속된 우리의 서글픈 운명에서 탈피하기 위한 일환으로 동맹의 자주성을 옹호하는 감성적 반론은 설득력이 없다. 주변의 변화를 무시한 채 내뱉는 대안 없는 지적과 주장은 오히려 국민의 불안감만 증폭시키는 역효과의 근본적인 이유로 굳어질 수 있다.
대중 관계도 마찬가지다. 진보 진영은 미·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주장한다. 보수 진영은 상호 존중에 입각한 협력적인 관계를 지향한다. 그러나 미·중 두 마리 토끼를 매번 다 잡을 순 없다. 우리 국익을 두고 때론 불가피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 우리 국익을 늘 존중하고 들어줄 리 만무한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한·중 간엔 비대칭적 권력구조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에 기반한 힘의 논리에 따라 우리는 중국의 존중하는 태도를 보장받기 어렵다. 이를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국제정치학의 현실주의는 세력 균형을 제시한다. 그래서 굳건한 한미 동맹의 기초 위에 대중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는 게 보수 진영의 논리다. 중국이 이런 우리를 달가워할 리 만무하다. 미·중 사이에서 우리는 결과적으로 미국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한미 동맹은 결국 우리의 대중 관계에 숙명적인 요소다. 그렇다고 대중 관계의 개선과 발전을 위해 한미 동맹의 자주성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처사는 우리와 중국의 지난 5000년 동안의 역사적 교훈을 망각하는 것이다.
대일 관계도 마찬가지다. 언제까지 역사 문제가 한일 양국 관계 발전에 족쇄가 되도록 둘 것인가. 아니, 그보다도 우리 정치인은 언제까지 한일 역사 문제를 국내 정치에 이용할 것인가. 역사 문제가 우리 국내 정치에서 당리당략과 정당이기주의를 위한 정치도구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평시에 우리 국민이 일본에 대해 가지는 호감도는 미국이나 중국 다음으로 높다.
그러나 역사 문제가 정치화하는 순간 우리 국민의 민족주의와 반일 감정은 선을 넘는다. 일본이 도발해도 우리가 때론 냉정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국내 정치인이 역사 문제를 사적 이익을 위해 정치도구로 악용하려 하면 국민이 때론 잘잘못을 따져봐야 한다. 한일 역사 문제에서 우리가 일말의 이성과 냉정마저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국민 정서에서 과연 역사와 미래를 분리할 수 있는 심적·정신적 여유가 있을지 의심스럽다.
세계는 4차 산업혁명과 미·중 전략 경쟁으로 격동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에 안주하고 있다. 세계는 우리를 필요로 한다. 우리도 세계가 필요하다. 세계는 세계 평화와 안정, 발전과 번영에 우리의 더 큰 기여를 원한다. 우리가 가진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과 세계적인 기술경쟁력,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국제적 영향력과 위상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기술경쟁력, 과학기술 수준, 경제력, 시장 규모, 구매력 등의 요인 때문에, 역으로 이런 능력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세계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외교는 세계의 기대와 우리 위상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대신 아직도 전통적인 현안에만 매몰되어 있다. 그 덕분에 외교 능력은 물론이고 사고력과 상상력, 예지력과 통찰력마저 얼어붙었다. 이념에 지나치게 경사된 나머지 진영 논리와 당리당략에 따라 외교의 방향과 전략을 수립하는 세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우리는 세상과 주변 국가의 변화와 속내에 무관심을 넘어 무지하고 무식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외교상 다음 두 가지 양상으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하나는 주변국의 국내 변화에 눈을 감고, 이들의 외교 동태를 파악하는 능력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길 기다리듯’ 그들의 행보를 추측만 하는 소극적 자세에 갇혀 버렸다.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가 당면한 대부분의 외교 현안들을 찬반론의 시각으로만 접근하는 악습에 갇혀 버린 것이다. 이런 폐습에 기대면 남는 건 역발상, 넓은 시야와 사고를 거부하는 악습관뿐이다. 찬반론을 통해 정해진 결과는 이분법적인 사고만 배양한다. 이런 사고로 우리의 현실적인 국익과 전략이익을 객관적으로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한 정책과 전략을 수립할 수 없다. 4차 산업혁명과 미·중 전략 경쟁 시기에 우리 국익과 전략이익은 이제 상당한 복합성을 띠고 있다. 이는 우리 국익이 확대의 기회와 더불어 상실될 수 있는 리스크도 커졌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찬반론과 같은 이분법적 사과와 접근 방식은 우리가 스스로 전략 옵션을 제약하고 축소하는 결과만 초래한다.
외교는 안보를 보장하고 발전을 보증하는 최선의 수단이다.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외교를 잘해야 하는 숙명을 갖고 태어난 게 우리의 운명이라는 말은 생소하지 않다. 우리가 생존하면 우리의 외교도 살아 움직여야 한다. 즉, 변화에 반응해야 한다. 외교가 생물인 이유다. 따라서 우리는 국제 관계에서 늘 딜을 해야 한다. 이기기 위해서, 때로는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늘 국익에 대한 정밀하고 정교한 전략 계산을 바탕으로 협상에 임해야 한다.
현재 우리의 대선 후보들은 전통에 매몰되어 객관적으로 정세의 전면을 직시하길 거부하면서 반쪽만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럴 경우 남는 건 반쪽짜리 전략 사고뿐이다. 결국 한국을 이끄는 새로운 지도자가 되고 싶다면 이들은 이제라도 우리 미래에 대한 고민, 정세의 발전 추이, 주변국의 경쟁 목표와 의도, 우리 외교의 중요성과 의의, 그리고 상대를 이용해야 하는 당위적 목적 등을 충분히 함축한 보다 발전된 외교 공약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주재우 필자 주요 이력
▷베이징대 국제정치학 박사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중국연구센터장 ▷브루킹스연구소 방문연구원 ▷미국 조지아공과대학 Sam Nunn School of International Affairs Visiting Associate Profess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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