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배달 라이더를 수차례 만나 인터뷰하고, 함께 배달 현장을 다녔습니다. 그 과정에서 플랫폼 앱과 연동된 신체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김아영 작가는 오는 10일부터 9월 14일까지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 ‘문법과 마법(Syntax and Sorcery)’을 개최한다. 영상, 월페이퍼 설치, 조각 작품 등 신작 11점을 선보인다.
김 작가는 한국 근현대사, 지정학, 이송, 초국적 이동 등의 역사적 사실과 동시대의 첨예한 이슈에 관한 작업을 해왔다.
기존의 영상 미학을 벗어난 독창적 접근과 상상력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은 베니스 비엔날레, 아시안 아트 비엔날레, 광주 비엔날레, 부산 비엔날레, 팔레 드 도쿄,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등의 국제 기획전과 국내외 유수 기관에서 선보인 바 있다.
갤러리현대에서 여는 첫 번째 전시에서도 독창적인 접근이 돋보인다. 이주(이동) 및 이주자에 관한 작업을 해온 김 작가는 코로나19 시대에 사람들의 단절된 관계를 연결하는 배달 라이더와 같은 플랫폼 노동자에 주목한다.
갤러리 지하 1층에 전시된 약 25분가량의 영상 작품 ‘딜리버리 댄서의 구(Delivery Dancer’s Sphere)’는 여성 배달 라이더 에른스트 모(Ernst Mo)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에른스트 모는 가상의 도시 서울에 살며,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배달 플랫폼인 딜리버리 댄서(Delivery Dancer)의 소속 라이더다.
어느 날 에른스트 모는 자신의 세계와 완벽하게 동일한 또 다른 가능 세계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자기 자신과 완벽하게 닮은, 마치 도플갱어나 유령과 같은 존재인 엔 스톰(En Storm)을 만난다. 에른스트 모와 마찬가지로 작가가 ‘Monster’의 철자를 바꿔 만든 이름이다. 그는 동일한 시공간에서는 공존 불가능한 사태와 관계의 다면들을 마주하며 혼란을 겪는다.
전시를 앞두고 9일 갤러리현대에서 간담회를 가진 김 작가는 “다양한 방식을 혼합하고 싶었다. 컴퓨터 그래픽스(CG) 전문가들이 7~8분이 함께 해주셨다”라며 “라이다(LiDAR) 센서로 서울 곳곳을 스캔한 자료를 바탕으로 가상 세계를 만들었다. 게임 엔진툴을 사용했고 디지털 아바타를 제작했다”라고 작품을 설명했다.
그는 배달 라이더가 배달 과정에서 겪게 되는 앱과 연동된 기이한 신체 감각과 뒤틀린 시공간의 개념을, 오래 관심을 두고 연구한 ‘가능세계론’과 접목했다. ‘가능세계론’에 의하면, 이 세계는 무수히 많이 존재하는 세계 중 하나이다. 무수히 많이 존재하는 세계의 논리에 따라, 완벽하게 동일한 세계가 둘 이상일 가능성이 있다.
김 작가는 “두 인물을 통해 다면적 관계를 표현했다”라며 “규정하기 힘든 관계다. 관계가 구원일 수도 있고 파국일 수도 있다”라며 이중성에 관해 설명했다.
1층에 전시 된 작품 ‘약정(Stipulation)’은 쉼 없이 배달 시간과 위치를 수신하며 귀신 들린 듯 멈추지 않고 작동하는 모바일 앱을 형상화했다.
이 작품은 댄서들이 앱을 켜고 콜 수신을 받아 라이트 상태를 확인하고 경로를 따라 배달을 하면서 자신의 몸을 앱과 완벽히 동기화했을 때, 그 알고리즘에 지배당한 신체 감각이 어떠한 것인지를 관객이 상상 및 경험하도록 안내한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조금도 쉬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김 작가는 “실제 플랫폼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앱과 비슷하게 작품을 만들었다”라고 설명했다.
2층 전시장의 양 벽면을 뒤덮은 가로 20m 세로 3m의 거대한 월페이퍼 작업 ‘다시 돌아온 저녁 피크 타임(Evening Peak Time Is Back)’은 웹툰 작가 1172와의 협업으로 완성됐다.
작가는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의 세계관과 얽히고설킨 복잡미묘한 관계를 확장하기 위해 웹소설과 웹툰의 하위문화물로 여성 간의 애정관계를 중심에 놓는 장르물인 GL(Girls’ Love) 문화를 접목했다.
갤러리현대는 “한국에서 극소수의 수요층으로 하위문화 중에서도 마이너로 분류되는 GL 문화의 기호들을 공유 및 가시화함으로써, 인종적, 계급적, 젠더적 소수인 여성 배달 라이더를 위한 사변적, 전복적 시각 서사를 만들어낸다”라고 짚었다.
2층 전시장 안쪽에는 세 개의 조각 ‘궤도 댄스(Orbit Dance)’ 연작이 매달려 있다. 김 작가는 “이 구조물은 수평과 수직으로 구가 맞물려 떨어지지 않는다”라며 “지독하게 얽혀 있는 관계를 의미한다”라고 설명했다.
김아영 작가는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 이면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왔다.
갤러리현대는 “김아영의 개인전 ‘문법과 마법’은 디지털 발자국을 수집 당하며 앱 알고리즘에 지배당하는 동시대의 주체들이 겪게 되는 이주에 관해 탐구하고, 이를 통해 다양한 세계가 문법을 초월하여 만나게 되는, 마법과 같은 존재들의 이야기를 선보인다”라고 소개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