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의 베트남 ZOOM IN] (42) 베트남 對중국 외교에 '삼배구고두례'는 없었다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안경환 KGS국제학교 이사장
입력 2023-11-17 06:00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안경환 KGS국제학교 이사장
[안경환 KGS국제학교 이사장]



베트남의 역사적인 특징 중 하나로 중국과 상호 대등주의를 꼽을 수 있다. 베트남 역대 봉건 군주들이 딘(丁)왕조(968~980)의 선황(先皇) 딘보린(Đinh Bộ Lĩnh·丁部領 924~979) 이래 모두 황제를 칭하여 중국 황제와 대등함을 보여주었다. 군주들이 모두가 황제를 칭했기에 관직도 황제 제도를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조정의 ‘육부(六府)' 제도다. 조선 군주는 황제가 아니라 왕이었기에 ‘육부(六府)'라 하지 못하고 ‘육조(六曹)'라고 했다. 또 다른 특징으로 ‘북거(北拒) 남진(南進)’을 들 수 있다. 북거(北拒)는 북쪽에 있는 중국의 침략에 항거한다는 것이고, 남진(南進)은 북부 홍하 델타 중심지에서부터 남부로 세력을 넓혀 다낭 중심의 짬빠(占城)왕국을 멸하고, 캄보디아 영토였던 남부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간 것을 말한다. 짬빠국이나 앙코르왕국도 베트남을 침략한 적이 있는데 영향은 크지 않았으나 중국은 베트남의 흥망성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베트남은 BC 111년부터 AD 938년까지 1049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고, AD 938년 독립 이후에도 송(宋)이 2회, 몽골이 3회, 명(明)이 1회, 청(淸)이 1회 등 모두 7회의 침략이 있었다. 그 가운데 명나라 침략만 막지 못하여 20년간 지배를 받았다. 자고로 베트남 역대 왕조는 중국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저항감에서 대등의식을 유지해 왔다. 베트남의 이러한 대등의식을 살펴보면 우리의 대(對)중국 외교정책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응오시리엔(Ngô Sĩ Liên·吳士連)은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를 편찬한 사람이다. 편년체 형식인 <대월사기전서>는 베트남의 홍방 시대인 BC 2879년부터 명나라를 물리치고 레러이(Lê Lợi·黎利·1385~1433) 장군이 즉위하는 1428년까지를 외기 5권, 본기 9권과 레(黎)태조기 1권 등 모두 1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기는 홍방 시대부터 응오꾸옌((Ngô Quyền·吳權)이 하이퐁과 꾸왕닌성 경계를 이루는 박익당(Bạch Đằng·白藤) 강에서 남한(南漢) 군사를 물리치고 독립한 938년까지, 본기는 응오꾸옌이 왕조를 세운 해인 939년부터 명나라 지배하에서 쩐(Trần·陳) 왕조 후손인 잔딘데(Giản Định Đế·簡定帝 1375~1410)가 쩐(陳) 왕조 부흥 운동을 전개했다가 실패로 마치는 1413년까지, 레(黎) 태조기는 1414년부터 레러이 장군이 레(黎) 왕조를 세우고 즉위하는 때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응오시리엔의 중국에 대한 대등의식을 살펴보면 첫째로 베트남 역사의 시작을 전설적인 BC 2879년부터로 함으로써 베트남 역사가 중국 역사만큼이나 장구함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다. 베트남 역사는 단군 조선의 BC 2333년보다 546년이나 먼저 시작되었다.

둘째로 명(明)나라는 1407년부터 1427년까지 20년 동안 베트남을 지배했으나 1407년 쩐(陳) 응에똥(Nghệ Tông,藝宗) 아들인 쩐응오이(Trần Ngỗi)는 스스로 잔딘데(簡定帝)라 칭하고 흥카인(Hưng Khánh·興慶)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응오시리엔은 쩐응오이와 뒤를 이은 쩐꾸이코앙(陳季擴) 시기(1407~1413)를 허우 쩐(Hậu Trần·後陳)이라 하여 독립된 왕조로 기술하고 있음으로 볼 때 명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셋째로 명나라 장군 장보(張輔)는 1414년 정월 쩐꾸이코앙의 부하 장군 2명을 포로로 잡았고 1414년 3월에는 라오스로 도망간 쩐꾸이코앙을 생포하여 쩐꾸이코앙 등을 명나라로 보내 처형한 것으로 명나라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응오시리엔은 쩐꾸이코앙이 잡혀가는 도중에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고 부하인 응우옌까인지(Nguyễn Cảnh Dị)와 응우옌수이(Nguyễn Súy)도 그 뒤를 따라 자살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역시 베트남인들의 중국에 대한 저항정신을 미화하기 위해 응오시리엔이 그렇게 기술한 것으로 추측된다.
 
넷째로 응오시리엔은 중국이 지배하던 540년대 리비(Lý Bí 또는 Lý Bôn)가 중국 지배에 반기를 들어 황제를 칭하고 나라 이름을 반쑤언(Vạn Xuân·萬春 544-602)으로 했던 것도 베트남의 독립된 왕조로 기술하고 있다. 리비가 죽자 그의 형 리티엔바오(Lý Thiȇn Bảo)가 이어받아 나라 이름을 새로 정하고 황제로 칭하며 저항을 계속하였고 그의 사후에는 친척 리펏뜨(Lý Phật Tử)가 뒤를 이었다. 리비와 리펏뜨도 응오시리엔은 각각 독립된 왕조를 세운 황제로 하여 전자를 ‘띠엔 리’(Tiền Lý·前李) 왕조의 리남데(Lý Nam Đế·李南帝)로, 후자를 ‘허우 리’(Hậu Lý·後李) 왕조의 허우 리남데(Hậu Lý Nam Đế·後李南帝)라고 했다. 이는 응오시리엔이 명나라의 지배를 최소화하려고 했던 의도로 볼 수 있다. 심지어 리비(Lý Bí)는 베트남 사람에 의해 살해되어 그의 수급이 중국 난징으로 보내졌음에도 응오시리엔은 리비가 병사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다섯째, 쩐꾸이코앙, 리비의 죽음과 유사한 기록은 AD 40년 중국 지배하에서 베트남 역사상 최초로 독립운동을 일으킨 쯩짝(Trưng Trắc)과 쌍둥이 동생인 쯩니(Trưng Nhị)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언니 쯩짝은 후한(後漢)의 태수 또딘(Tô Định·蘇定)에 의해 결혼을 앞둔 남편 티사익(Thi Sách·詩索)이 살해되자 동생인 쯩니와 더불어 대규모 저항운동을 일으켰다. 쯩자매(Hai Bà Trưng)는 후한(後漢)의 원정군 사령관 마원(馬援)의 군대와 싸우다가 43년 초 생포되어 차열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전서>에는 쌍둥이 자매는 처형된 것이 아니라 홍강 지류인 핫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는 중국에 대한 저항을 강조하는 응오시리엔이 베트남 민족의 여걸이 처형당한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스스로 자살했다고 기술함으로써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2023년은 베트남 최초의 독립운동 1983주년이 되는 해였으며, 베트남은 매년 하노이 메린에 있는 쯩자매 사당에서 독립운동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여섯째, 응오시리엔은 1076년 리트엉끼엣(Lý Thường Kiệt) 장군이 송나라 군대를 공격하기 전날 부하를 송나라 진영 근처로 보내 부르게 한 노래도 <전서>에 기술하고 있다. 이 노래는 베트남을 남국, 중국을 북국으로, 베트남 군주를 남제(南帝)로 하여 중국의 천자, 즉 북제(北帝)와 대비시키고 있는데 이는 베트남과 중국 두 나라 사이에 어떤 상하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곱째, 응오시리엔이 찌에우다(Triệu Đà·趙佗 BC 235~BC 137) 사후에 그 뒤를 이은 손자 반브엉(Văn Vương)을 미화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반브엉은 민월(閩越)이 침략하자 한(漢)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한(漢)은 그 대가로 친조를 요구하였다. 이에 반브엉은 병을 핑계로 내세우고 자기를 대신하여 큰아들 아인떼(Anh Tề)를 보냈다. 응오시리엔은 이를 가법(家法)을 이어받았다고 했는데 가법이란 찌에우다가 황제를 칭하면서 한나라와 대등한 입장을 취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덟째로 응오시리엔은 명(明)과 관계에 처음으로 ‘교방(交邦)'이라는 용어를 썼다. 교방(交邦)은 국가 간 큰 나라, 작은 나라 개념의 상하질서보다는 대등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베트남 군신들에게 중국에 대한 조공이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훨씬 후대인 응우옌(Nguyễn) 왕조(1802~1945)에서는 청(淸)과 관계를 ‘방교(邦交)’라고 하였다. 베트남에서는 이웃 짬빠나 캄보디아에서 사신이 올 때 이를 조공이라 했을 뿐이다.

베트남 역사에서 중국에 대한 베트남의 저항의식은 지속적이었고, 저항의식은 베트남 민족의 잠재의식 속에서 발현되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1978년 12월 말 베트남은 친중(親中)파인 크메르 루주(Khmer Rouge)가 장악하고 있는 캄보디아를 침입하여 이듬해 1월 초 수도 프놈펜을 점령했다. 이에 중국은 한 달 뒤인 1979년 2월 베트남을 공격하였고, 베트남은 주저 없이 맞대응하였다. 이것이 중월 국경 분쟁이고,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 한다. 또한 남중국해에서는 호앙사 제도와 쯔엉사 제도 영유권 문제로 베트남은 중국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역사적으로 중국에 대해 가졌던 베트남 민족의 저항의식의 연속 선상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규칙에 기반한 해양 질서에 심각한 도전을 자행하고 있다. 남중국해 도서에 대한 영유권 문제는 중국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아세안 국가들과 분쟁이 발생한 것이다. 베트남은 ‘규칙에 기반한 질서’를 스스로 위반하는 중국을 어떻게 할 것인가? 중국의 이 같은 국제법 위반은 베트남만의 문제가 아니고 아시아‧태평양 시대에 항해의 자유를 위협하는 심각한 도발 행위임이 분명하다. 대중국 베트남 외교역사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이니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와 같은 저자세는 유례가 없고 항상 대등한 위치에서 방교(邦交)해 왔으니 그 맥락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할 것으로 예측된다.



안경환 필자 주요 이력
 
▷KGS국제학교 이사장 ▷하노이 명예시민 ▷전 조선대 교수 ▷전 한국베트남학회 회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