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위기 '확전 여부'에 대한 결정권을 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75)의 결정에 모두가 주목하고 있다. 지난 6개월간 수많은 민간 사망자가 나오고도 전쟁을 끝내지 못해 '실각' 위기에 놓였던 그는 최근 이란과의 무력 충돌을 동아줄 삼아 지지율을 회복 중이다. 그의 정치 경력은 늘 위기 속에서도 다시 연장되는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왔다.
네타냐후 총리는 도합 16년 동안 집권한 이스라엘 최장수 총리다. 1949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태어난 그는 중·고등학생 시절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보냈다. 1967년 고등학교 졸업 뒤 이스라엘로 돌아와 이스라엘방위군(IDF)에 입대해 5년간 여러 전투에 투입됐다. 전역 후 그는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업 중이던 1976년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된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엔테베 작전'에 참여한 형 요나단 네타냐후가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형을 끔찍이 아꼈던 네타냐후 총리는 아직도 죽은 형과 국가의 중대사는 물론 개인사를 상의한다고 2016년 뉴욕타임스(NYT) 인터뷰 도중 말하기도 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공부를 마친 뒤 1978년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그는 국제 테러를 연구하는 '반테러연구소'를 설립해 이스라엘 정계와 처음 관계를 맺었다. 이때 맺은 인연을 토대로 네타냐후 총리는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유엔 주재 이스라엘 대표로 재임하면서 국제사회에서 이스라엘의 얼굴로 나섰다. 이 기간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아버지와 친해져 트럼프 전 대통령과 밀월 관계를 과시하기도 했다.
승승장구할 것만 같던 그의 정치 생애는 이후 부침을 반복했다. 1996년 첫 부임 후 네타냐후는 1999년 선거에서 야당에 참패해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는 이후 정계로 복귀하며 외무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2선에 머물러 있던 네타냐후는 2005년 리쿠드당 지도부로 복귀했다. 2009년에는 다른 우파 정당과 연립정부를 수립해 두 번째로 총리를 맡게 된다. 2021년까지 무사히 연임에 성공했지만 2021년 코로나19 방역 실패와 팔레스타인 갈등 문제에 대한 책임론으로 정권을 야당에 넘겨줘야 했다.
잠시 물러났던 네타냐후 총리는 또다시 2022년 선거에서 우파 연합을 이끌어 승리한 뒤 총리로 복귀했다. 그는 국민들에게 강력한 안보 체계 확립을 약속했으나 2023년 10월 이슬람 무장 정파 하마스의 공격으로 수백 명이 인질로 붙잡혀가는 사건이 발생해 대내외에서 대규모 '퇴진' 압박을 받았다. 그는 하마스 섬멸이라는 목표하에 가자 지구 침공을 감행했으나 현재까지도 전쟁을 끝내지도, 인질을 귀환시키지도 못해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도 이스라엘 내부에서 퇴진 시위가 이어지고, 심지어 유명 석학 유발 하라리 예루살렘 히브리대 교수도 "복수를 멈추라"고 공개 비판하기도 했다.
이처럼 수세에 몰렸던 네타냐후는 최근 이란의 공격으로 전환점을 맞게 됐다. NYT는 20일(현지시간) 네타냐후 총리의 지지율이 상승했다고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네타냐후 총리의 지지율은 37%를 기록해 지난해 10월 하마스와 전쟁을 시작한 직후보다 2배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정계 라이벌인 베니 간츠 국가통합당 대표와의 차이도 5%포인트로 줄었다. NYT는 네타냐후의 지지율 반등은 이란과 본토 공격을 주고받는 불안정한 상황의 효과를 본 것이라며 이란과 직접 공격을 주고받는 와중에 국민들은 이란에 대한 강경한 메시지를 주도해 온 네타냐후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매체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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