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가 헤어나오기 힘든 늪에 빠졌다.” 지난 21일 삼성, SK 등 국내 주요 기업 사장단이 ‘이례적으로’ 기자회견에서 내놓은 긴급성명의 내용이다. 10월까지 파산 선고된 기업 수가 1380개로 지난 한 해의 건수를 넘어 역대 최대치 기록을 경신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성장률 전망을 2.5%에서 2.2%로 낮추었고 내년 성장률 전망은 2.2%에서 2%로 더 낮추어 잡으면서 “강력한 경제정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IMF가 기재부를 향해 경고성 전망을 제시한 것도 이례적이다.
오늘날 한국의 경제관료는 사실상 정치권의 감독과 통제에서 벗어난 하나의 독자적인 권력집단으로 진화했다. 권한을 넘어 권력으로 진화한 모피아의 모습은 문재인 정부 경제수석에서 윤석열 정부 경제부총리로 갈아탄 최상목 장관이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들 경제정책권력의 기반은 유권자가 아니라 대통령에 의한 임명이고 권력수단은 경제 관련 이데올로기에 관한 전문지식 및 법령 정보와 인적 네트워크에 있다. 보수 정권에서는 복수의 기재부 출신 국회의원을 매개로 사실상 신자유주의 이념적 동지인 여당과 일체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야당은 기재부를 견제할 역량을 강화한 것으로 보이지만 기재부를 견제하기에는 힘에 부치는 모습이다. 그래서 기재부는 경제정책에서 약간의 숫자놀음만 빼면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선출되지 않았으니 유권자의 눈치도 볼 것 없고 그들의 임명권자는 모피아 의존도가 너무 높다. 그래서 모피아의 확대재생산은 무난하게 진행된다.
정치(인)에 대한 여론의 불신과 관료에 대한 신뢰에 입각하여 기재부의 정치권력화는 현 정부 들어 두드러진다. 현 정부 들어 나타난 추가적인 현상은 모피아 출신 지방선출직 정치인의 등장과 모피아의 타 부처로의 확산이다. 선거에 출마하는 모피아 출신 후보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고 타 부처에서 모피아 출신을 장관으로 모시는 명분이 되는 것은 ‘내가 예산을 많이 끌어올 수 있다’는 공약 또는 기재부의 예산편성권이다.
경제정책권력으로서 기재부에 최근 불거진 세수추계상의 오류 문제는 기재부의 정체성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사안이 되고 있다. 기재부는 문재인 정부 마지막 연도에 코로나 종식 국면에서 재원 부족을 이유로 국민지원금을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100조원에 달하는 세수가 과소 추계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문재인 정부는 발칵 뒤집어졌지만 정권교체로 사안은 묻혀버렸다. 기재부식 ‘정권 갈아타기’의 성공이었다. 검찰관료 출신 대통령의 묵인과 용인하에 독립적인 경제정책권력으로서 야당까지 자신의 신자유주의 감세 이데올로기에 복무시키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윤석열 기재부의 무모한 재정건전성 이데올로기는 재정정책을 꼼수 집합소로 만들고 있다. 적어도 다음 점에서 기재부는 나라 곳간 비우기를 넘어 대한민국을 장기 불황에 진입시키려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첫째, 세수추계 오류를 초래한 추계모델을 공개할 의향도, 점검하여 필요한 개선을 할 의향도 없다. 이는 2025년에도 수십조 원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추계오류를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미국 트럼프 정부의 출범에 따른 국제통상환경의 급변은 미국을 최대 흑자국으로 두고 있는 한국에 가장 큰 타격을 줄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에 더욱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둘째, 세수 부족에도 불구하고 추경을 하지 않겠다는 고집은 그에 따른 세출 감소가 초래할 성장률 하락을 감수하겠다는 배짱이다. 이는 정부의 예산편성권의 명백한 남용이다. 기재부는 오히려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헌법 제119조 ②항)에 더 충실해야 한다. 지난 3분기 성장률이 한국은행 전망치 0.5%에도 크게 미치지 못하는 0.1%를 기록한 것을 수출 부진과 내수 부진으로 돌리는 것은 두 요인 모두 정책적으로 자초되었다는 점에서 몰염치한 책임전가이다. 반도체, 방산 상품을 수출하는 기업 자체를 수출하는 것을 실적으로 자랑하는 윤석열 정부의 어이없는 정책기조하에서는 상품 수출 실적 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재생에너지 공급의 적기 확충을 지연시키는 것도 마이너스 성장을 의도하지 않는 한 내릴 수 없는 결정이다. 내수 역시 기업 투자 부족은 물론 정부의 좋은 일자리 창출 정책 부재, 임금 인상 억제 정책, 과도한 가계부채와 은행의 독과점적 금리정책 등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셋째, 세수 부족에도 불구하고 기재부는 맹목적 부자감세 기조를 고수하고 있다. 감세를 출발점으로 하고 세수추계 오류를 핑계로 세출을 지방재정에서부터 줄인다. 이로 인한 지방경제의 위축과 지방소멸의 촉진은 불을 보듯 뻔하다.
넷째, 부족한 세수를 메우기 위해 한은 일시대출금과 각종 기금을 사용하는 ‘꼼수’를 동원하고 있다. 지난 7월 정부의 한은 일시대출금이 105조원을 돌파하여 한도를 초과하자 각종 기금을 끌어다 사용하고 있다. 기재부는 ‘위법’이 아니라 항변하지만 기금의 사용 목적에 어긋나는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외국환평형기금은 지금처럼 환율변동성이 심할 때 절실한 재원인데 세수 부족을 메우는 데 가장 많은 6조원을 부담시키는 것은 정부가 나서서 외환시장 불안정성을 부추기는 것과 같다. 지금처럼 성장을 통한 세수 확충의 비전도 없어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가 바닥인 상황에서 ‘급하니 일단 쓰고 보자’는 것은 한국 경제의 장기 전망을 더욱 암울하게 만들 뿐이다. 기재부 장관이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외평기금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한 발언을 뒤집은 것이기 때문에 정책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다섯째, 외국환평형기금뿐만 아니라 기금을 헐어 세수결손을 보충하는 것은 커다란 경제이론적 오류를 안고 있다. 세수와 기금은 각각 유량(flow)과 저량(stock)이기 때문에 전용의 문제가 아니라 자칫 기금이 소진될 수 있다. 기금 사용은 그것을 다시 메울 방안이 반드시 제시되어야 하고 실행되어야 한다. 재충전 대책 없는 기금 사용은 후대의 생존 기반을 위협하는 행위이다.
여섯째, 기재부가 차입한 기금의 상환을 다음 정부에 떠넘긴다면 ‘폭탄 돌리기’가 시작되면서 국가 신인도 악화로 이어진다.
일곱째, 이 모든 국가신인도 훼손은 ‘건전재정’이라는 이데올로기적 하위목표를 달성하고자 야당과 여론을 압박하려는 일종의 ‘자해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윤석열 기재부의 축소지향성이 국회 다수 야당의 동의하에 실행되는 것은 한국 경제의 비극이다. 기재부가 올인하고 있는 건전재정은 경제정책에서 결코 자기목적이 될 수 없으며 경제정책의 목표서열에서도 매우 낮다. 더욱이 ‘감세를 통한 건전재정’은 형용모순이다. 지금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부자감세는 국가 신인도 하락과 경기 침체의 늪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지금 시급한 것은 감세가 아니라 금융투자세 폐지를 철회하고 세수를 확충하는 것이다. 아울러 국세청의 고액체납자 집중추적은 연례행사가 아니라 연중업무가 되어야 한다.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을 여당이 ‘홍보 부족 탓’으로 돌리는 것은 경험상 비전 상실에서 오는 정권 말기 증상이다. 위헌적인 재정건전성 입법 시도에 대해서는 당연히 탄소중립2050과 디지털전환을 실행하는 산업정책과 좋은 일자리 정책이 대안으로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을 장기 침체의 위험에서 구제하여 ‘망국병’인 계층간, 지역간, 세대간 불평등 해소에도 성공하는 나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김호균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독일 브레멘대 경제학 박사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교수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서울대 경제학과 ▷독일 브레멘대 경제학 박사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교수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