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끝에서 조각이 자라난다. 종잇조각들이 이리저리 자유롭게 뻗어 나가며 얼기설기 얽힌다. 붓이 흩뿌린 물감은 조각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생명력을 주고, 조각들의 움직임은 끝없이 퍼져나갈 듯하다.
4일 찾은 신성희(1948~2009) 개인전 ‘꾸띠아주, 누아주’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은 ‘회화로부터’(2009)다. 이 작품은 신성희 작업 세계의 정점인 ‘누아주(엮음회화)’ 시리즈 중 하나다.
‘회화로부터’는 붓끝에서 조각이 탄생하는 순간을 담아낸 듯하다. 작품의 붓은 신성희 본인이 사용했던 것이라고 한다. 갤러리현대 권영숙 디렉터는 이 작품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각이라고 해야 할까, 회화라고 해야 할까. 작가는 제목을 ‘회화로부터’라고 명명했다. 입체가 된 회화를 상징한 것 같다. 본인을 위해서 봉사했던 붓, 자 등이 더는 쓸 수 없게 됐을 때 자신의 작품으로 이렇게 영원히 남겼다.”
‘색의 연금술사’로 불렸던 신성희는 말려진 캔버스롤을 바닥에 펼쳐 추상회화를 그린 뒤 그 캔버스를 일정 간격으로 잘라냈다. 잘린 색띠들은 작업실 한쪽에 걸어 뒀다가, 영감이 떠오르면 거미가 거미줄로 집을 짓듯 색띠들을 직조해 입체적인 회화를 완성했다.
그는 1980년대 당시 한국 미술계에서는 볼 수 없던 화려한 색채에 ‘종이 뜯어 부치기’ 등을 통해 독자적인 작업 세계를 선보였다.
색채에 눈을 뜬 건 파리유학 시절이다. 1980년 파리에 도착해서 대성당을 방문했을 때 스테인드글라스로 쏟아지는 빛에 매료됐다. 이번 전시에서 최초 공개되는 신성희의 '공심(空心)’ 3부작(1971)을 통해서도 그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공심' 3부작은 1971년 '제2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특별상을 받으며,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정연심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교수는 “한국(시절 작품)이 약간 흑백 사진이었다면, 파리에서는 컬러감에 눈을 뜨게 된 것 같다”면서도 “70년대 작품이 나름대로 흥미롭다”고 말했다. 이어 “70년대 작품이 한국미술사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면, 파리로 가면서부터는 한국미술사와는 결이 달라진다”며 페인팅을 대체하고 콜라주와 박음질 회화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콜라주, 꾸띠아주, 누아주 세 개를 중심으로 작가의 40여년의 예술 여정을 회고할 수 있는 주요 작품 32점을 만날 수 있다. 신성희의 회화 세계는 크게 네 시기로 분류된다. ‘마대 회화(극사실 물성 회화)’ 시리즈(1974 –1982), ‘콜라주(구조공간)’ 시리즈(1983–1992), ‘꾸띠아주(박음회화)’ 시리즈(1993–1997), ‘누아주(엮음회화)’ 시리즈(1997–2009)다.
전시는 갤러리현대에서 3월 2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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