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 캐즘(일시적 수요적체)의 터널을 지나 슈퍼사이클(초호황)이 올 것이란 기대감을 품고 배터리 기업들이 큰 적자에도 지속해서 설비 투자에 나서고 있다. 각국 정부도 중국 배터리 기업이 전 세계를 잠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직접적인 보조금을 편성했다. 한국 정부도 더는 뒤처져서는 안 된다.
이달 초 파나소닉이 TV 사업 매각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배터리 업체들이 얼마나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구스미 유키 파나소닉 회장은 "TV 사업을 매각 또는 축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TV 사업 매각으로 핵심 사업에 자원을 집중하고 미래 성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여기서 핵심 사업이란 바로 배터리를 말한다. 현재 테슬라 등에 배터리를 공급하며 중국·한국 기업과 경쟁하고 있는 파나소닉은 TV 사업 매각과 경영효율화로 확보한 자금을 배터리 생산설비 확충 등에 투자해 캐즘을 버티겠다는 복안을 품고 있다.
일본 정부는 총 6000억엔(약 5조7000억원)의 보조금을 편성해 전기차·배터리 업체에 지급하기로 했다. 이를 토대로 2030년까지 일본 내 배터리 생산 규모를 현재의 두 배인 150GWh(기가와트시)로 키우겠다는 게 일본 경제산업성의 야심이다.
전기차 포비아(공포증)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게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행보이지만, 공화당 소속 하원 의원조차 트럼프 행정부가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 45X항(미국 내 생산 배터리 세액 공제)’을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강경한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적자 등의 이유로 배터리 산업에 대한 투자가 멈추면 향후 중국의 배터리 굴기에 대응할 수 없게 된다는 우려가 그 배경에 있다.
한국 배터리 기업도 캐즘 속에서 기술·캐파(생산능력) 경쟁력 유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례로 LG에너지솔루션은 1조6000억원 규모 회사채를 신규 발행해 자금을 확보하고 이 중 70%를 북미 합작법인(JV) 생산설비에 투자하기로 했다. 채무상환(7.8%)보다 미래에 투자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SK온도 고객사 유지·확대에 집중하며 다가올 업턴(호황)에 대비하고 있다. 페라리와 관계가 대표적인 사례다. SK온은 충남 서산공장에서 생산한 배터리 일부를 페라리 하이브리드 차량(PHEV)에 공급하고 있다. 아직 페라리의 요구 수량이 규모의 경제에 도달하지 못해 생산할수록 적자를 보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하지만 오는 10월 페라리가 첫 순수 전기차(BEV)를 선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BEV·PHEV 비중을 80% 이상으로 높이면 흑자로 돌아설 것으로 예측된다. SK온 입장에서 페라리와 긴밀한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투자인 셈이다.
기업들의 자구 노력에 호응해 산업을 육성·발전시키는 게 정부의 의무다. 현재 한국 정부의 배터리 보조금은 흑자를 내는 상황에서 법인세를 차감해 주는 투자 세액공제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캐즘이나 대규모 투자 등으로 인해 적자인 기업은 영업이익을 내기 전까지 관련 혜택을 받지 못한다.
흑자와 적자를 오가는 사이클 산업인 배터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정책이다. 때문에 미국·중국 등은 배터리 업체에 영업손실과 관계없이 공제받지 못한 세액을 현금으로 환급하는 직접적인 보조금 정책을 펼치고 있다. 한국 정부의 배터리 보조금 정책 변화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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