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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에 뭔가 있어요!”
미국 영화 ‘미스트’(2008)는 기이한 안개가 몰려오면서, 그 안에 도사린 정체불명의 괴생명체에 두려움을 갖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린다. 등장인물들은 짙은 안개로 인해서 괴생명체의 실체조차 파악할 수 없다. 이들은 마트를 안전지대로 삼고, 짙은 안개 속을 향해 나아가길 주저한다.
25일 찾은 리움미술관 올해 첫 전시 피에르 위그의 ‘리미널(liminal)’은 안개로 뒤덮인 새까만 어둠,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기다리는 미지의 세계로 걸어가는 듯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몰려오는 불안감은 마치 영화 '미스트' 속 인물들이 안개 속으로 발을 디딜 때의 두려움에 가깝다. 본능적으로 경계를 세웠다.
리미널의 어원은 라틴어 ‘limen(경계)’이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 피에르 위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를 보여준다. 생명체는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하기 마련. 관람객들은 전시장을 서서히 걸으며 점차 그 어둠에 익숙해진다.
하지만 전시를 다 본 뒤에는 픽사 애니메이션 '월-E'가 떠오른다고 할까. 월-E가 텅 빈 지구에 홀로 남아 수백 년간 ‘폐기물 수거 처리용 로봇’이라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듯, 인간이든 투구게·원숭이·로봇 등 비인간이든 모든 존재는 변화하는 환경과 상호반응하며 복잡한 세상을 형성한다. 세상은 인류 이전부터 있었고, 또 인류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란 만고불변의 진리다.
여기에 인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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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서 가장 처음 만나는 작품, ‘에스텔라리움(Estelarium)’은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알린다. 약 45억년 전 지구가 형성될 때 가장 먼저 생긴 암석, 화산암(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에는 출산 직전 임산부의 배가 남긴 흔적이 있다.
피에르 위그가 만든 이 새로운 세계에서는 비인간 존재들이 인간(관람객)을 포함한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한다.
작품 ‘리미널(Liminal)’에는 얼굴과 머리가 뻥 뚫린 알몸의 여성이 무한한 표면을 헤맨다. 인간인 듯 아닌 이 존재는 외부에서 오는 자극에 영향을 받아 매번 다른 장면을 보여준다고 한다. 리움은 ‘인간이 아닌 이 존재는 공간이자 경계적 환경(liminal milieu)으로 제시된다’라고 설명했다. 이 ‘경계적 환경’은 또 다른 공간인 ‘작품 밖 세계’ 즉 전시장 속 인간의 흔적을 감각에 아로새기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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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마스크’ 속 원숭이 역시 경계적 존재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로 인간이 모두 사라진 공간, 버려진 식당에서 사는 원숭이는 냉장고를 열거나 닫고, 테이블에 물수건을 갖다 놓는 등 인간에게 배운 동작을 끝없이 반복한다. 소녀 마스크를 쓴 이 원숭이는 긴 머리카락을 꼬거나 매만지기도 하는데, 이럴 때는 영락없는 인간의 모습이다. 오지 않을 손님을 기다리는 듯한 원숭이는 이 구역에 인간이란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매개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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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고원에서 기계가 인간의 유해를 정리하는 장례의식을 담은 ‘카마타’(Camata)를 통해서도 관람객과 비인간은 상호작용한다. 이 작품 역시 외부 환경과 교류하며 실시간으로 영상을 편집하고 송출한다. 천장에 달린 황금색 센서는 온도, 습도, 소음, 열기 등을 리얼타임으로 수집하고, 또 리얼타임으로 송출 이미지를 바꾼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이 사라지고 남은 뼈와의 상호작용은 ‘경계’의 끝을 지나 인류가 없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같았다.
존재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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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서는 세 개의 수족관을 볼 수 있다. 전시장에 놓인 세 수족관 ‘주드람 4(Zoodram 4)’(2011), ‘주기적 딜레마(Circadien Dilema (El Dia del Ojo))’(2017), ‘캄브리아기 대폭발 16(Cambrian Explosion 16)’(2018)은 불확실한 세계다. 이 수족관들은 자연적 생태계를 그대로 재현한 것도, 완벽한 세트장도 아니다. 조건은 정해져 있지만,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는 세계라고 한다. 그럼에도 생명체들은 이 짙은 안개로 뒤덮인 듯한 세계에서 제 나름대로 살아간다.
특히 5억4000만년 전 캄브리아기 대폭발 당시 출현한 화살게, 투구게, 말미잘 등이 살고 있는 ‘캄브리아기 대폭발 16’은 인류 이전, 혹은 이후에도 존재는 계속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피에르 위그가 아시아에서 개인전을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이번 전시는 ‘질문’이라고 말했다. “내 작업은 인간 존재론에 대한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질문이고 그 원형에 대한 탐구다. 나는 전시가 이것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전시는 7월 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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