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철 글로벌비지니스연구센터 원장]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산업 경쟁에서 대만 쪽으로 확실히 기울어지고 있는 분위기다. 한때 한국에 유리하게 돌아가던 분위기가 최근 들어 대만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반도체 비즈니스의 핵심 3요소는 기술, 제조, 그리고 고객 신뢰이다. 양국의 대표주자인 삼성과 TSMC가 기술과 제조에서는 양 회사의 경쟁이 계속되겠지만 고객과의 신뢰 유지 측면에서는 TSMC가 우위를 보일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인다. 자체적인 브랜드를 가진 삼성과 달리 소위 얼굴 없는 파운드리(위탁생산업체)이지만 이것이 고객과의 신뢰 확보에 전력투구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전·후방 모든 산업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 반도체 업체들이 경쟁에서 이기려면 새겨들어야 할 내용이다.
대만이 보유하고 있는 또 하나의 강점은 대기업과 부품을 공급하는 중소기업 간에 촘촘하게 짜여 있는 가치사슬, 즉 생태계다. 지난 50년간 대만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만들어진 부품 밸류체인이다. 이는 해외와도 연결되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현재 반도체 칩 설계·제조 기업인 ‘NVIDIA(엔비디아)’의 창업자 젠슨 황이 대만 출신이다. 그는 대만 기업과 끈끈한 연결고리를 활용하여 상호 윈-윈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해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흔히 엔비디아를 탄생시킨 것이 대만 IT 기술의 총합에서 비롯되는 말이 회자하고 있을 정도다. 이제 이들의 협력은 자연스럽게 AI 부문으로 이어진다. 글로벌 AI 업계의 슈퍼 갑으로 불리는 엔비디아가 대만을 AI 인프라의 허브로 만들겠다고 천명했다.
TSMC 이외에도 폭스콘·콴타·위스트론 등 부품 회사들이 전 세계 AI 서버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고 상당수의 유수 빅테크들의 대만 하드웨어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엔비디아와의 결합을 통해 단순 저부가가치 부품의 메카란 오명을 벗고 첨단 부품 공급 기지로 빠르게 변신 중이다. 대만의 승승장구에는 미국 엔비디아의 젠슨 황과 리사 수 AMD 회장, ‘호국신산(나라를 지키는 신령한 산)’이라고 불리는 TSMC의 창업자 모리스 창과 웨이저자 현 회장, 류앙웨이 폭스콘 회장 등 대만 출신 IT 테크 리더들이 각각이 아닌 하나의 축, 즉 ‘대만 네트워크’를 만들어 원대한 꿈을 가지고 세계 반도체 혹은 AI 시장을 선도하겠다는 결속력에서 나오며, 대만 정부도 이를 적극적으로 백업한다.
한국 제조업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는 것은 대만만이 아니다. 중국은 반도체를 제외한 다수 분야에서 한국을 앞지르고 있다는 분석이 줄을 잇는다. 역설적으로 미국의 제재가 오히려 중국 기술의 굴기를 부추기고 있는 꼴이다. 정치적으로 중국과 대만의 관계가 악화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제조업 생태계는 끈끈한 연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으로는 첨단 제조업 부활을 서두르고 있는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대만은 협력을 복원해 나가고 있는 것이 눈에 크게 띈다. 반면 한국은 아직도 일본에 대한 편견으로 별다른 제휴의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이는 한국 제조업이 주변국의 협공으로 자칫 사면초가에 빠져 헤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위험 신호다. 한국 제조업의 생존 방식이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든다.
주변국 협공에서 생존하려면 출발선을 다시 정리해야
이러한 위기 징조는 수출 전선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트럼프발(發) 관세 폭탄 후폭풍은 비단 한국에만 특히 불리한 것이 아니라 대다수 경쟁국이 직면하고 있는 공통 딜레마다. 그리고 모든 나라가 협상을 통해 관세율을 조정, 피해를 최소화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 하지만 올해 1분기 대미(對美) 수출을 보면 주요 경쟁국 중 한국만 유일하게 마이너스(-1.3%)를 보였다. 우등생 대만은 48.8%,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도 각각 5.2%, 2.3%, 36.4% 늘었다. 이러한 수출 경고등은 2분기에도 계속되는 추세다. 5월 들어서도 수출 부진이 여전하고 미국의 관세 폭탄에 한국이 가장 먼저 주저앉는 나라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관세 전쟁의 최대 희생양이 한국이 되는 것 같아 실로 안타깝다.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고질적 문제점은 대외 불확실성에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다. 외부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더 탄탄하게 결집하는 중국이나 대만 기업의 응집력이 우리에게 잘 보이지 않는다. 지레 겁을 먹고 혼비백산하는 꼴이다. 대만을 AI의 심장으로 만들기 위해 엔비디아·TSMC·폭스콘 삼각편대를 중심으로 뭉치고 있는 것이 부럽다. 중국은 미국과의 기술 전쟁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인재 양성에 열을 올린다. 해외 우수 인재 유치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대학의 교육도 이공계 비중을 늘리면서 획기적인 변신을 서두른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안일하고 무능하다. 해외에 있는 우수한 한국계 인재도 한국을 외면하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들을 반겨줄 수 있는 생태계가 국내에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조기 대선(大選)으로 정국이 한창 달아오르고 있다. 한국 경제의 근간인 주력 제조업의 기반이 무너지고 AI와 같은 첨단 제조 분야에서도 경쟁국이 움직이는 속도보다 무척 늦다. 기껏 한다는 얘기가 민생을 살린다고 돈 푸는 타령만 하는 것이 고작이다. 관세 전쟁과 중국산 저가 공세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에 대한 해답은 찾아보기 힘들다. 경제의 순환을 얘기하면서 해묵거나 효과도 크지 않은 정부 주도 재정 지출을 꺼낸다. 경제를 좀 안다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현재의 경기 침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기업 주도 성장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성장 동력을 살려내고 일자릴 창출을 통해 소득의 증가를 유도하고 소비를 창출할 수 있다. 주변국 협공을 막아내고 경제 우등생으로 환생하려면 출발선을 재정리해야 한다.
김상철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경제대학원 국제경제학 석사 △Business School Netherlands 경영학 박사 △KOTRA(1983~2014년) 베이징·도쿄·LA 무역관장 △동서울대 중국비즈니스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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