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스톰'
트럼프 대통령의 2기 행정부가 출범한 지도 어느덧 6개월. 예상대로 1기보다 더욱 강력하고 동시다발적인 ‘트럼프 스톰’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트럼프발 '상호관세' 공세로 국제 무역 질서는 대혼란에 빠졌고 '이익이 없으면 우방도 없다'는 트럼프식 접근이 더욱 노골화되면서 전후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체제를 함께 수호해온 동맹국들과의 신뢰 관계는 크게 흔들리고 있다. 과연 미국 스스로 만들어낸 지금의 세계 질서를 뒤흔드는 트럼프의 속내는 무엇인가? 아마도 우리는 그 단초를 2011년 대통령 출마를 꿈꾸며 펴낸 저서 'Time to Get Tough: Making America #1 Again'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는 이 책에서 미국이 "the greatest country the world has ever known(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나라)”이지만 "온갖 국가에 바보처럼 당하는 모습을 보며 세계의 호구로 전락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미국이 "물렁한 태도를 버리고 강경하게 나가면 다시 부국이 될 수 있다”며 “대통령은 국가를 위해 큰 거래가 성사되도록 만드는 유능한 협상가일 뿐”이라고 단언했다.
트럼프의 일관성 없는 관세정책을 비꼬는 신조어로 트럼프 타코(TACO)가 있다. 'Trump Always Chickens Out'의 약자로 트럼프가 강경한 협박 후 시장 불안이나 반발에 직면해 정책을 철회하거나 연기하는 패턴을 조롱하는 표현이다. 대표적인 예로 지난 4월 '해방의 날' 을 선포하며 전 세계를 상대로 부과했던 상호관세에 대해 일주일 후 90일 유예 처분 결정이 나왔다. 미 국채 금리 급등으로 금융시장이 요동치자 트럼프가 겁이 나 뒤로 물러선 것이다.
관세든 안보든 모든 것을 거래로 생각하는 트럼프의 철저한 '거래주의(transactional approach)'에 최근 일본까지 반발하면서 트럼프 1기 때 유난히도 굳건했던 미·일 동맹까지도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는 미·중 무역갈등과 중국의 군사적 팽창 속에서 한반도 안보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철저한 사업가인 트럼프의 거래주의는 그의 환심을 얻기 위한 '글로벌 입찰 경쟁'을 유도해 미국이 더 많은 투자를 유치하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북한 비핵화나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이 복잡다단한 문제의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국제 전문가들의 지배적 의견이다.
트럼프 2기 집권 이후 예측불허의 대외정책은 전 세계를 혼란과 불안에 빠트리고 있다. 그렇다고 미국 사회 내부도 결코 평온치도 않다. 급진적인 이민·세제 정책의 변화로 사회적 갈등이 표면화되고 연방정부 지출 감축과 복지 축소는 저소득·취약 계층의 불만을 폭발시키고 있다. 이 모든 현상의 밑바탕에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권력 집중 현상이 있다.
지난 7월 4일 미국은 독립 250주년을 맞았다. 초창기 13개 주가 영국 군주에 저항해 독립을 쟁취했던 그 이상을 되새기며 전국 곳곳에서 축제가 열렸으나 이번에는 국가의 미래에 대한 걱정도 공존했다. 트럼프 집권 이후 대통령의 권력 팽창이 민주공화국의 근본적 가치를 위협하고 있다는 우려이다.
확대일로의 대통령 고유 권한 행사와 '정치적인 힘'은 트럼프 2기 논란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트럼프는 백악관 복귀 즉시 행정명령을 남발했다. 대통령 권력을 견제해는 의회, 사법부, 내부통제장치는 사실상 무력화되고 있다. 그는 의회 승인 없이 이란을 공격하라는 명령까지 내리며 공화당 내부에서까지 헌법 논쟁을 촉발시켰다. 주(州) 방위군을 동원해 반(反)이민 시위에도 무력을 투입하는 등 자신이 통제하는 모든 국가 자원을 ‘정치적 수단’으로 삼고 있는 모습이다. 이와 함께 법무부의 독립성마저 위협당하고 있다. 대통령 관련 수사를 무마하고, 반대파를 조사·처벌하라는 식의 직접적인 대통령의 개입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인들은 점점 이런 트럼프에 둔감해지고 있다.
BBC 보도에 따르면 런던정치경제대의 피터 트루보위츠 교수는 최근 "(트럼프가) 적어도 외교 정책에 있어서는 리처드 닉슨 이후 가장 중앙집권적인 정책 결정 체제를 구축하고 했다"며 "이로 인해 정책 결정이 트럼프의 성격과 우선권 그리고 기질에 더욱 의존하게 됬다"고 진단했다.
지난 5월 트럼프는 대놓고 카타르 정부로부터 보잉 757 비행기를 선물로 받았다. 최근에는 엡스타인 성 추문사건 관련 음모론이 다시 수면 위에 오르면서 지지율이 트럼프 2기 출범 후 최저치로 내려갔다. 대통령직을 사적으로 활용하는 그의 친암호화폐정책도 미국 사회에서 다양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 최고의 명문 대학 중 하나인 하버드에 대한 연방정부 지원 중단 조치는 '공공기금'이라는 명분으로 대학의 운영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로, 트럼프식 권력 사용이 민주적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현재 대통령을 견제할 의회는 명목상의 저항만 할 뿐인 상황이다.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한 가운데 트럼프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거나 벌벌 떨고 있기 때문이다.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 Act·OBBBA)’
이러한 권력 집중의 상징적 결과물이 바로 지난 3일 수많은 논란과 우려 속에 공화당 주도로 상·하원을 모두 통과한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 Act·OBBBA)’이다. 이 법안은 트럼프 2기 출범 후 자신의 가장 큰 국내 정치적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1기 때 주요 법안이 좌초되며 무력감을 맛봤던 트럼프는 이번에는 달랐다. 극소수만 반대표를 던지게 할 정도로 당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수백만 명의 사회안전망을 약화시키고, 수조 달러의 국가 재정적자를 유발할 것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독립기념일(7월 4일)을 이번 법안 처리 마감일로 내세우며 강력하게 밀어붙여 통과시킨 것이다.
이리하여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정책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올해 말 종료될 예정이었던 개인 소득세율 인하,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 주·지방세(SALT) 공제 한도 인상 등 광범위한 감세 조치가 영구화된다. 강경 이민책을 뒷받침할 예산도 대거 책정됐다. 국경 안보에 1700억 달러를 투입할 계획으로 미국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에 465억 달러, 구금시설 10만개 확충에 45억 달러 등이 배정됐다. 복지 삭감 조치에도 연방 적자는 2034년까지 3조3000억 달러 이상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이다. 흥미로운 점은 감세 효과는 빠르게 체감될 수 있도록 설계한 반면 논란이 큰 복지 삭감 등은 내년 선거나 2028년 이후로 본격적인 시행 시기를 미뤘다는 것이다. 이는 표심 이탈을 최소화하려는 정치적 계산으로 보인다.
공화당은 이번 법안의 조기 통과를 내년 중간선거 전략의 발판으로 여기며 '경제 성장, 소득 증대, 국가안보 강화'를 주요 메시지로 삼고 있다. 반면 민주당은 '부자 감세, 서민 증세'를 내세우며 복지 삭감과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핵심 쟁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공화당 입장에서 '반란표'가 원천 봉쇄된 이번 법안 처리는 향후 정국에서 반드시 플러스 요인은 아니다. 당내 다양성이 실종되고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지며 공화당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도 법안에 대해 부정적이다. 이코노미스트와 유고브의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53%가 법안에 반대하며 지지한다는 비율은 35%에 그쳤다. 일론 머스크 등 사회적 영향력이 큰 인사들도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하며 새로운 정당 창당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경제가 트럼프 운명을 바꾼다
트럼프는 지난해 높은 물가에 대한 유권자들의 분노를 등에 업고 당선되었다. 그는 “취임 첫날부터 즉시 물가를 낮추겠다”고 약속하고 관세 정책에 대해선 미국을 “지독하게 부유하게 만들 것”이고 “떠난 기업들을 다시 불러와 투자와 고용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불법 이민자 추방 정책 역시 주택 가격을 낮추고 미국 태생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 1월 20일 취임식 날 백악관 성명에서도 “진정한 미국의 황금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사실 트럼프 2기 집권 이후 미국 경제는 '트럼프 스톰'에 의해 엄청난 변화가 올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현재 가장 놀라운 점은 그가 재집권한 이후 지난 6개월간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수치상 미국 경제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실업률은 4.2%로 지난 1년간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 트럼프 취임 이후 인플레이션은 약간 하락했지만 지난해 9월 수준인 2.4%에 머물고 있다. 올해 1분기 경제는 소폭 위축됐으나 2분기에는 연율 약 2.5% 성장한 것으로 추정돼 상반기 전체 성장률은 1~2% 사이, 연간으로 예상되는 성장률은 약 1.4%이다. 이는 지난해(2.8%)보다 느리지만 극적인 변화라고 보기 어렵다. 실질 임금과 가계 소득은 모두 전년 대비 소폭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으나 그 속도는 다소 느려졌다. 트럼프와 참모진은 경제 상황의 답보 상태를 전임 조 바이든 대통령 탓으로 돌리며 정책 효과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한다.
향후 정국에서 트럼프와 공화당이 마주할 최대 변수는 명백히 ‘경제’일 것이다. 만약 감세와 정부지출 삭감, 그리고 대외관세 정책(트럼프는 이를 ‘3각 성장론’이라 부른다)이 단기간에 고용·경제성장·가계 실질소득 증가로 이어진다면 공화당의 선거 구도는 탄탄해질 수 있다.
반면 인플레이션 재등장, 실업률 상승, 복지 삭감으로 인한 사회적 불만이 확산된다면 '크고 아름다운 법안'은 트럼프와 공화당에 ‘아킬레스건’으로 변모할 수 있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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