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다자무대인 중국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에 참석했다. ‘수령 중심의 유일체제’ 최고지도자가 여러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취급당할 수 있는 부담을 감수하고 다자외교무대에 등장한 배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전승절 참가를 결심한 데는 핵을 가진 ‘전략국가’의 자신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받은 공통의 경험을 가진 북한 지도자가 전통 우방인 중국의 전승절 행사에 참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지난 6년 동안 정상회담을 하지 못할 정도로 북·중 관계가 소원했고, 다자무대이기에 김정은이 참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주류였다. 북·중 관계가 소원하게 된 데는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때문이다. 세계중심국가(G2)로 부상한 중국이 국제사회의 우려와 제재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북한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중국은 ‘한반도 3원칙’으로 한반도 평화와 안정, 비핵화, 대화와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을 내세우고, 한반도 비핵·평화를 위해 3자 회담과 6자 회담 주최국으로 나서는 등 한반도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중국이 전승절 행사에 김정은 국무위원장 초청에 공을 들이고 이를 실현한 것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와 일방주의가 한몫했다. 이번 전승절의 주인공은 김정은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은과 김주애가 주목받은 것은 미국을 압박하려는 중국의 의도에 북한이 호응했기 때문이다. 북·중·러 정상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1959년 중국 건국 10주년 열병식 이후 66년 만이다. 톈안먼 망루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옆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나란히 자리함으로써 북한이 핵을 보유한 ‘군사강국’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고 ‘사실상 핵보유국’임을 인정·승인받는 간접적 효과를 누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북·중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문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트럼프식 일방주의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북한이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도움이 절실하기에 전승절을 계기로 북·중 관계 복원에 나섰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에 동참하면서 북·중 교역이 위축된 데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한동안 북·중 교역이 전면 중단되는 시기도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북한과 러시아가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고, 북한이 러시아에 파병함으로써 북·러 관계가 ‘혈맹관계’로 발전한 것도 북·중 관계를 소원하게 만든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북한의 러·우 전쟁 파병으로 러시아에서 첨단무기기술, 에너지, 식량 등을 지원받고 있지만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핵·미사일 개발을 지속하여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고 있는 북한이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미국이 비핵화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고 주장하고, 북·미 대결을 ‘제재 대 자력갱생의 정면돌파전’이라고 규정하고 자립경제를 고수해왔다. 수렁에 빠진 북한 경제를 구원한 것은 우크라이나전쟁과 트럼프의 일방주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북·미 적대관계 해소와 관계 정상화를 통해서 생존을 모색하려던 북한이 ‘하노이 노딜’ 이후 자력갱생으로 근근이 버텨내다가 코로나로 국경을 자체 봉쇄하여 이중의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여 북한은 북·미 관계 대신 북·러 관계에서 ‘생존의 중심고리’를 찾고자 했다.
북한은 러시아의 에너지와 식량 지원으로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예비를 확보하고, 지난해부터 ‘지방발전 20×10정책(매년 20개 지방 시군을 공업화·현대화하는 10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이 자체 힘으로 중앙과 지방의 차이를 해소하는 균형발전계획을 완수하기는 쉽지 않기에 중국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김정은이 전승절 참가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북·러 국경에 새로운 다리를 건설하고 있는 북한이 10년 전에 완공한 단둥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신압록강대교를 지금까지 개통하지 않고 있다. 북·중 교역과 경제·사회문화 교류를 확대하려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본주의 황색바람’을 수용할 수 있는 사상이론적 조정이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북한은 ‘반동사상문화배격법’ ‘청년교양보장법’ 등을 제정하고 체제 이완을 막는 데 급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김정은의 중국 전승절 행사 참가의 부수적 효과는 4대 세습을 대외적 공식화하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2022년 11월부터 북한 내부에서 ‘사랑하는 자제분’ ‘존귀하신 자제분’으로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김정은의 딸 김주애가 이번 방중에 동행함으로써 북한에서 후계가 준비되고 있다는 점을 대외적으로 알렸다. 사회주의 국가의 정치불안과 정치변동은 후계와 관련한 경우가 많았다. 중국만 하더라도 마오쩌둥(毛澤東)이 후계자로 린뱌오(林彪)를 내정했지만 린뱌오가 마오쩌둥 암살을 모의했다가 실패하고 해외로 도망가다가 몽골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 사례가 있다.
북한은 김주애의 중국 방문과 함께 9월 3일자 노동신문에 “우리 공화국은 사소한 편향이나 우여곡절도 없이 계승 문제를 성과적으로 해결하여왔다”고 하면서 “영도의 계승 문제를 당과 혁명의 전도를 좌우하는 근본 문제, 사회주의국가정치체제의 계승에서 근본 문제로 내세우고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완벽하게 해결한 것이야말로 주체조선의 더없는 자랑이고 긍지”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혈통계승론’과 ‘계속혁명론’을 내세우고 ‘백두혈통’이 대를 이어 집권하는 것을 일종의 ‘관습헌법’으로 하는 ‘수령제’를 제도화하였다. 지금은 김정은이 김주애를 후계자로 내정하고 후계수업을 시키는 단계로 볼 수 있다. 그동안 외부 세계가 북한 지도자의 유고를 북한 붕괴와 등치시켜 흡수통일을 말해왔다. 김정은이 김주애를 첫 다자외교무대에 동행함으로써 외부 세계가 더 이상 정권 붕괴와 흡수통일을 꿈꾸지 말라는 경고를 발신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이 다자외교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했으니 ‘전략국가’의 자신감을 가지고 국제 규범에 맞는 외교 행보와 세계 경제로 공세적으로 나오길 기대해 본다.
필자 주요 이력
▷전 통일연구원장 ▷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전 청와대 안보실 정책자문위원장 ▷현 국회 한반도 평화외교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