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칼럼] 한국 콘텐츠 생태계가 잃어버린 '출판의 허리'

  • 김수영 초비북스 대표

김수영 초비북스 대표 사진초비북스
김수영 초비북스 대표 [사진=초비북스]
한국 출판 시장에는 지금 명확한 구조적 문제가 있다. 베스트셀러 중심의 상업 출판과 1인 창작 기반의 독립 출판만 존재하고 그 사이를 연결해야 할 ‘중간 규모 출판 생태계’가 사실상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 현상은 단순한 산업의 흐름이나 자연스러운 시장 선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랜 기간 누적된 유통 구조, 콘텐츠 투자 방식, 작가 육성 부재가 만든 결핍의 결과에 가깝다.
 
출판사를 설립하고 시장에 본격적으로 들어오며 나는 이 공백을 단순한 ‘느낌’이 아닌 분명한 구조적 현실로 확인하게 됐다. 작가 섭외, 기획 과정, 유통 미팅, 계약 검토 등 출판의 초입 단계마다 반복적으로 드러난 것은 시장에는 작가를 발굴하고 성장시키는 단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왜 이 거대한 콘텐츠 시장에 작가와 출판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중간 영역이 존재하지 않을까?' 이 질문은 지금 출판 생태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됐다. 그런데 그 사이, 즉 작가를 발굴하고 함께 호흡하며 시간을 들여 성장시키는 중간 규모 출판 생태계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 한 작가는 미팅에서 “내 이야기를 함께 정리해 줄 출판사를 찾고 싶었다”며 “그런데 대형 출판사는 이미 완성된 결과물만 원하고 독립 출판은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지금의 출판 시장을 비유하자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대량 생산된 공장식 식빵과 집에서 만들어 먹는 수제빵만 존재하는 것이다. 둘 다 필요하지만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본인 취향과 속도, 이야기를 담은 동네 베이커리를 찾기 시작했다. 출판도 마찬가지다. 독자들은 단순히 ‘새 책’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선과 새로운 목소리를 찾는다.
 
하지만 지금 구조 속에서 그 목소리가 자라기란 쉽지 않다. 유통 수수료, 홍보 비용, 서점 매대 경쟁, 온라인 알고리즘까지 신생 출판사와 신인 작가는 책이 나오기도 전에 체력의 대부분을 소모한다. 그 결과 시장은 자연스럽게 ‘이미 검증된 책’을 택하게 되고 다양성은 줄며 비슷한 구조와 표현이 반복된다.
 
그럼에도 나는 희망을 본다. 최근 독자들은 책을 단순한 활자가 아니라 경험의 방식으로 소비하고 있다. 북토크, 클래스, 전시, 굿즈, 공간 경험까지, 책은 더 이상 종이 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책은 출발점이고 플랫폼이며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필요한 방향은 분명하다.
 
먼저 출판사와 작가가 함께 성장하는 협업 구조가 필요하다. 단기 계약이 아닌 기획부터 독자 경험까지 함께 설계하는 방식이다.
 
둘째, 신생 출판사를 위한 편집·유통·저작권·IP(지식재산권) 확장 지원 체계가 필요하다. 이는 산업 보호가 아니라 창작 생태계를 회복하기 위한 투자다.
 
셋째, 책을 단일 매체가 아니라 콘텐츠 IP의 기점으로 바라보는 관점 전환이 필요하다.
 
나는 이제 막 출판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시장 안에 ‘비어 있는 공간’을 매일 느낀다. 그 빈자리는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벽처럼 느껴지지만 동시에 앞으로 출판이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표식 같기도 하다. 누군가는 그 자리가 비어 있기 때문에 주저하고, 누군가는 그 자리가 비어 있기 때문에 시작한다.
 
나는 후자의 선택을 해보고 싶었다. 출판은 단순히 책을 만드는 산업이 아니다. 사람의 생각이 형태를 갖추고, 기록되고, 누군가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출판은 늘 느리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래간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빠른 콘텐츠가 아니라 더 깊이 읽히는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중간지대가 없다면 누군가는 그 자리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기다려주는 시장, 시도할 수 있는 공간, 실패해도 사라지지 않는 생태계. 그 기반 위에서만 출판의 다양성과 실험은 살아남는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사라진 중간지대는 소멸한 것이 아니라 다시 설계될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그 자리를 다시 만드는 일은 거대한 선언이 아니라 작은 선택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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