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기술은 있는데 자금이 없다…신산업의 '금융 병목'

  • AI·반도체 등 신산업 기업 자금난 심각

  • 담보 중심 대출 구조가 가장 큰 걸림돌

  • 마중물 역할은 못하고…위험 회피 강화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인공지능(AI)·반도체·바이오가 국가 첨단전략산업의 핵심 축으로 떠올랐지만 금융 구조의 병목현상으로 기업들의 성장 엔진이 꺼지고 있다. 정부 규제와 글로벌 불확실성이 겹치며 금융사의 위험 회피 심리가 강해진 탓이다. 담보와 실적에 치우친 금융 관행이 기술 가치 평가를 가로막으면서 성장 초기 기업들이 자금 조달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1일 한국중견기업연합회가 발표한 '2025년 중견기업 금융 애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 기업 28.7%가 전년 대비 자금 사정이 악화됐다고 밝혔다. 60.4%는 비슷하다고 답했으며 자금 사정이 나아진 기업은 10.9%에 불과했다. 시중은행 대출금을 자금으로 활용하는 중견기업들은 △높은 금리(49.9%) △까다롭고 복잡한 심사(8.8%) △과도한 담보·보증 요구(8.0%) 등으로 애로를 겪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기업 성장을 위한 마중물이 돼야 할 금융이 제 역할을 못하면서 기술 경쟁이 아닌 금융 구조가 신산업 성장에 최대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담보 중심 대출 구조는 기업금융의 가장 큰 걸림돌로 꼽힌다. 기술력·성장성보다 부동산·유형자산 보유 여부가 대출 성패를 가르면서 연구개발(R&D) 중심의 기업일수록 금융 접근성이 낮아지는 역설적 상황에 노출돼 있다. 최근 들어 기업의 사업성·성장성 등 비재무적 요소를 활용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여전히 담보와 매출이 대출의 최우선 조건인 것이다.

금융권의 위험 회피 성향이 강화된 점도 자금 경색을 부추기는 이유로 꼽힌다. 글로벌 경기 둔화와 환율 변동성, 자산 건전성 관리 부담이 겹치면서 리스크 축소에 무게를 둔 영향이다. 국내 은행의 중소법인 연체율(0.93%)이 '심리적 마지노선'이라고 불리는 1%에 육박하면서 금융사들은 기업대출에 대한 리스크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

정부가 작년 하반기부터 생산적 금융에 대해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면서 기업들을 향한 자금 지원이 확대될 가능성은 높다. 그러나 기업대출에 대한 실질적 지원책이 나오지 않으면 은행들의 보수적 운용 기조는 강해질 수밖에 없다. 일례로 이달부터 주택담보대출 위험가중치 하한이 15%에서 20%로 높아지는데 기업대출은 이보다 3배 이상 높은 75%가 유지된다. 현 정책대로는 기업금융을 할수록 재무적 부담이 커져 안전성 위주로 자금을 운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정부가 150조원 규모로 국민성장펀드를 추진하는 점도 변수다. 금융지주가 자체적으로 공격적 기업대출·출자에 나서더라도 정책펀드에 우선적으로 자금이 배분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금융사로서는 개별 기업의 기술력과 사업성을 직접 평가해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정책 자금에 편승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부담이 작은 선택지가 된다.

문제는 이러한 기업의 자금난이 단순한 개별 기업 문제를 넘어 첨단전략산업 전체의 실행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민간 금융이 성장 초기 기업에 대한 자금 공급을 꺼리면 신산업 육성을 내세운 국가 주도 성장 전략은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이는 곧 금융의 역할 재편 없이 현 구조가 고착되면 금융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호준 중견련 상근부회장은 "급격한 대내외 환경 변화에 따라 투자와 고용, 시장 진출 등 측면에서 기업의 자금 사정이 더욱 악화할 우려가 크다"며 "보다 효과적으로 기업의 활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정책금융의 문턱을 낮추고 시중은행의 경직적인 운영 기준을 완화하는 등 고질적인 자금 조달 애로를 먼저 해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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