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자의 아시아 인사이트 ① | 진리 정의 자유] 방글라데시 정권 교체와 아시아의 미래 — 서구의 거울이 아닌 우리의 눈으로
아브라함 곽 입력 2026-02-15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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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는 더 이상 세계 질서의 변방이 아니다. 인구와 생산, 기술과 문화의 중심축은 이미 동쪽으로 이동했고, 세계 교역의 거대한 물류망은 아시아 항만을 통과하며, 디지털 혁신과 문화 산업 역시 아시아 도시들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언어만큼은 여전히 서구의 프리즘을 통해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민주주의의 성숙과 후퇴, 시장경제의 성공과 실패가 서구적 기준에 얼마나 근접했는가에 따라 평가되고, 아시아는 늘 비교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질문을 바꿀 때다. 아시아는 서구의 거울 속에서 스스로를 확인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역사와 경험 속에서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가.
이 글은 새롭게 시작하는 ‘아시아 인사이트’의 첫 문장이다.
아시아를 설명하는 언어를 아시아 내부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의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아시아적 맥락에서 재해석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출발한다. 그 첫 시험대가 바로 방글라데시의 최근 정권 교체다. 방글라데시는 1971년 독립 이후 군사 쿠데타와 권위주의 통치, 가문 정치와 거리 정치가 교차하는 격동의 현대사를 겪어 왔다. 민주주의는 반복적으로 도전받았고, 선거는 때로는 갈등과 분열을 동반했다. 양대 정당인 아와미연맹과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은 오랜 세월 권력을 놓고 경쟁해 왔고, 그 과정은 단순한 정당 정치가 아니라 국가 정체성의 방향을 둘러싼 대립이기도 했다.
방글라데시 신문 1면을 차지한 라흐만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BNP) 총재 대행 [사진=연합뉴스]
2026년 총선은 그 역사적 궤적 위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이 주도하는 연합은 전국적인 선거 운동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유권자들의 지지를 확보했고, 선거 당일 높은 투표율 속에서 의석 과반을 넘어서는 결과를 얻었다. 투표와 개표는 국제 감시단과 국내 선거관리 당국의 감독 아래 비교적 안정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일부 이의 제기가 있었음에도 대규모 충돌 없이 결과가 수용되었다.
이는 단순한 승패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이 총칼이 아닌 투표로 이동할 수 있음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17년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타리크 라흐만이 차기 총리로 유력해진 이 과정은, 군부나 비상 통치가 아닌 헌정 절차에 따라 권력이 이동했다는 점에서 상징성을 갖는다. 선거 이후 권력 이양 과정에서도 급격한 충돌을 피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새 지도부는 국가 안정과 제도 정상화를 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밝혔다.
이 정권 교체의 의미는 방글라데시 내부에만 머물지 않는다. 아시아는 지금 미·중 전략 경쟁, 보호무역의 확산, 에너지 안보의 불안, 기술 패권 경쟁이라는 복합적 질서 속에 놓여 있다. 글로벌 공급망은 재편되고 있고, 중견국들은 특정 강대국 의존을 피하며 균형 외교를 모색하고 있다. 방글라데시 역시 특정 국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경계하며 외교와 경제 전략을 다변화하겠다는 방향성을 내비쳤다. 이는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들이 공유하는 고민이기도 하다. 강대국 경쟁의 장이 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방글라데시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선거 승리는 출발점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단지 투표를 통해 성립하지 않는다. 사법의 독립, 언론의 자유, 야당의 존재를 인정하는 정치 문화, 행정의 투명성이 결합될 때 제도적 민주주의는 뿌리내린다. 선거 이후의 절제와 균형, 권력 사용의 자제는 새로운 정부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다. 법치가 흔들리면 시장은 특권의 도구가 되고, 제도적 신뢰가 무너지면 경제 성장은 지속되지 않는다. 방글라데시의 정치 전환이 진정한 민주적 제도 정착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는 앞으로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경험은 의미 있는 참고가 된다. 한국 역시 식민지의 상처와 전쟁의 폐허를 딛고, 권위주의 체제를 거쳐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확립했다. 동시에 수출 중심 산업화와 교육 투자, 기술 혁신을 통해 경제 도약을 이뤄 냈다.
한국의 발전은 단순한 성장 통계가 아니라 권력에 대한 시민의 감시, 법치의 확립,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 그리고 규칙 속에서 작동하는 시장경제가 결합된 결과였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수정하고 보완해 온 과정이었다. 민주주의는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진화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한국은 체험했다.
방글라데시와 한국은 이미 깊은 인적 교류를 이어 가고 있다. 수많은 방글라데시 근로자들이 한국 산업 현장에서 일하며 기술과 제도를 경험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노동 이동을 넘어 사회적 학습의 통로가 되고 있다. 계약의 신뢰, 안전 규정의 준수, 생산 관리 체계, 전자정부와 디지털 행정의 경험은 경제 성장의 보이지 않는 기반이다. 이러한 경험은 귀국 후 방글라데시의 산업과 공공 부문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 K 민주주의, K 이코노미, K 컬처는 구호가 아니라 경험의 집합이며, 촛불과 투표, 수출과 혁신, 콘텐츠와 창의성이 결합된 축적의 결과다. 이를 공유하는 것은 우월성의 과시가 아니라 상호 학습의 과정이어야 한다.
아시아는 오랜 식민지 경험과 군부 독재, 일당 지배의 시간을 거치며 정치적 성숙을 향해 걸어왔다. 그 길은 직선이 아니었고 때로는 후퇴와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시민 의식은 축적된다. 교육의 확산과 정보 접근성의 확대는 권력의 독점을 어렵게 만든다. 시장경제는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을 요구하며, 이는 제도 개혁을 촉진한다. 아시아적 시각은 자유와 시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국의 역사와 문화에 맞게 제도화하려는 노력이다. 공동체적 가치와 개인의 권리를 조화시키고, 성장과 공정의 균형을 모색하는 접근이다.
‘아시아 인사이트’는 이러한 맥락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서구의 시각을 부정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를 설명하는 언어를 아시아 내부에서 구축하려 한다.
방글라데시의 정권 교체는 단지 한 나라의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아시아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 주는 사례다.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법이 권력 위에 서며 시장이 공정한 규칙 속에서 작동할 때 번영은 지속 가능해진다는 사실은 특정 문명의 전유물이 아니다.
진리와 정의, 자유는 인류 보편의 가치이며 아시아 역시 그 주체다. 아시아는 더 이상 주변이 아니다. 스스로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스스로의 언어로 세계를 설명할 때 비로소 중심이 된다.
방글라데시의 선택은 그 여정의 한 장면이며, ‘아시아 인사이트’는 그 여정을 기록하는 첫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