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행정부는 지난 2월 초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위원회에서 대북 인도적 지원 사업에 대한 제재 면제를 승인했다. 이번에 제재 면제된 사업은 보건·식수·취약계층 영양 지원,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등 17개 분야로 위원회가 제재 면제를 결정한 것은 약 9개월 만이다. 유엔 안보리는 2006년 북한의 핵실험 이후 결의안 1718을 시작으로 무기·연료·사치품·이중용도 물자 등 다양한 품목을 금지하는 포괄적 제재 체계를 구축해왔다. 이는 모든 회원국이 이행해야 하는 국제법적 구속력을 갖는다. 제재의 집행과 예외 승인(waiver)은 1718 제재위원회가 담당하고 있다. 인도적 지원이라도 특정 장비나 물자가 제재 품목에 포함될 경우, 위원회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는 북한의 군사·핵 개발에 전용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다.
유엔 제재와는 별개로 미국도 독자적인 법률을 통해 금융·무역·개인·기관을 대상으로 매우 강력한 대북 제재를 부과하고 있다. 미국의 제재는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 성격을 띠기 때문에, 제3국 기업도 미국의 금융망을 이용하려면 사실상 미국 제재를 따를 수밖에 없다. 유엔 안보리 제재 완화나 면제에 미국의 동의가 필요한 이유는 유엔 안보리 산하 제재위원회가 만장일치(consensus)로만 의사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반대하면 어떤 인도적 지원 면제도 승인될 수 없다. 미국은 그동안 북한의 미사일·핵 개발 지속을 이유로 인도적 지원 프로젝트의 승인조차 지연시키거나 반대해왔다. 이번 제재 면제는 미국의 정책적 태도 변화가 반영된 것이지만, 국제 NGO의 지속적 요청과 함께 한국 정부가 미국과의 협의를 통해 제재 면제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한 결과이기도 하다.
다만, 이번 조치는 제재 완화가 아니라 ‘인도적 지원에 대한 제한적 예외’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구조적 변화로 보기는 어렵다. 이는 미국과 한국이 대북 대화의 문을 열기 위한 환경 조성 차원에서 시도한 조치로 해석된다. 따라서 이번 결정이 즉각적인 대화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북한은 현재까지 미국·한국의 대화 제안에 응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러시아·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물론, 지원 물자가 실제로 북한 주민에게 전달되고 국제기구의 활동이 재개될 경우, 북한도 일정 부분 긍정적 신호를 보낼 여지가 있으나, 현 단계에서는 정치·외교적 분위기 조성 이상의 의미를 갖기는 어렵다. 한국 정부 역시 북한이 이를 평화 공존을 위한 노력으로 받아들이기를 기대하면서도,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인도적 지원이 이뤄져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어 인도적 지원의 구조적 한계를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첫째, 지원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기본적으로 부족한 자원을 보충하는 외부 자원일 뿐이다. 그것이 곧바로 신뢰나 관계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지원이 잘못 설계될 경우, 북한은 이를 체제 약화를 유도하는 수단이나 일회성 회유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인도적 지원이 평화 신호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목적을 배제한 순수성이 분명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둘째, 지원이 북 체제에 대한 파급효과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 명확히 드러나야 한다. 지원의 목적이 주민의 생존과 재난 대응에 한정되고, 정치적 개혁이나 개방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일관되게 유지될 때, 북한은 이를 체제 위협이 아닌 관리 가능한 외부 변수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인권 문제가 지원 조건과 연결되는 순간, 북한은 이를 평화 신호가 아니라 체제 압박으로 받아들인다.
셋째, 지원이 일회적 선의가 아니라, 반복이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구조로 제시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지원이 신뢰 신호로 기능한다. 단발성 식량 지원이나 이벤트성 물자 제공은 북한에게 전략적 판단을 요구하지 않는다. 반면, 계절·재난·보건과 연동된 정기적 지원 체계는 상대가 갑작스럽게 정책을 전환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정적 기대를 형성할 수 있다.
넷째, 지원이 일정한 정치적 비용을 감수한 결정임이 드러나는 것도 중요하다. 이는 국내 여론의 반발이나 동맹국과의 조율 부담을 감수하더라도 지원이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인도적 지원이 북한에 대해 ‘되돌릴 수 없는 양보’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지원 수용이 핵 문제나 군사 문제와 연결되면, 북한은 이를 위험한 선택지로 판단한다. 반대로 지원과 안보 현안을 명확히 분리하고, 지원 수용이 군사적 취약으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를 마련할 때, 인도적 지원은 부담 없는 신뢰의 신호가 될 수 있다.
다섯째, 지원의 전달 방식이 핵심적 요소가 되어야 한다. 공개적이고 상징적인 지원은 북한에게 체면 손상과 체제 약화로 인식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 국제기구나 제3국을 경유한 비공개 지원은 정치적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관계 지속의 신호로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다. 북한이 ‘침묵’으로 반응할 때조차, 그것이 거부가 아닌 수용의 전조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섯째, 지원이 장차 더 넓은 평화 구조로 확장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야 한다. 지원을 계기로 보건 협력, 재난 공동 대응, 환경 협력 등으로 자연스럽게 확대될 수 있는 통로를 열어두는 것이다. 북한은 이러한 확장 가능성을 통해 상대가 관계 자체를 관리하려는 의지가 있는 것으로 판단할 것이다.
현 단계에서 남북관계의 돌파구는 군사적·정치적 타결 보다는 인도적·비정치적 분야에서의 접촉 복원에 있다. 대북 인도적 지원은 단순한 구호를 넘어 신뢰 복원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다만, 제재 체제, 국내 여론, 국제 공조라는 제약 요인이 존재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투명성을 확보하고,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강화하며, 정치적 조건과 분리된 순수 인도적 접근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 정부는 국제 사회와 공조하면서도 주도권을 잃지 않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될 때, 인도적 지원은 북한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시험해볼 수 있는 평화 채널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2의 건국'의 원년이 되도록 하자.
필진 주요 이력
▷독일 브레멘대학 세계경제연구소 연구원 ▷통일연구원 북한경제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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