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에 큰 충격을 주고 있는 이란전쟁이 길어지고 있다. 김정일은 미국의 위협이 있을 때면 백두산 인근 지하 벙커 등에서 장기 칩거하며 사태를 관망했다. 하지만 김정은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이 한창일 때도 숨지 않고 딸 주애와 함께 현지지도를 활발히 했다.
최근 김주애의 군사관련 공개 활동이 늘어나고 있는 점을 후계자 덕목 쌓기와 관련해서 주목해야 한다. 김주애는 당과 국가의 공식 직책을 맡고 있지 않지만 2인자 의전과 예우를 받고 있는 ‘백두혈통’의 계승자로 부상했다. 북한 지도부는 핵무력강화정책에서 성과를 거두는 시기가 ‘장군형 지도자’의 덕목 쌓기에 유리할 것으로 보고 후계 구축을 서두르는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을 무대로 한 항일무장투쟁에서 ‘수령체제’ 정당화의 근거를 찾는 북한에서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장군형 지도자이다. 북한 지도자들은 당과 국가의 공식 직책 이외에 김일성 수령-김정일 장군-김정은 원수라는 군사칭호를 사용한다.
2022년 11월 18일 화성-17형 발사현장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딸 김주애가 공개 활동을 시작한 이래 군 관련 현지지도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장군형 지도자의 덕목을 내세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13살로 추정되는 미성년 김주애의 저격용 소총 사격, 권총 사격, 신형 탱크 조종 등은 장군형 지도자의 덕목을 쌓기로 볼 수밖에 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아버지 김형직이 물려준 ‘두 자루 권총’이 오늘날 ‘군사강국, 총대철학의 시원’이라고 선전한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시험 현장에 처음 등장한 김주애가 군사국가의 상징인 권총을 사격하는 모습을 과시함으로써 후계와 관련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으로 보인다.
1984년 1월 8일 생인 40대 초반의 김정은이 후계를 서두른 이유가 뭘까? 무엇보다 3대 세습을 통해서 수령제 국가(수령체제)를 완성했기 때문에 조기 후계 구축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백두혈통이 대를 이어 집권하는 것이 일종의 ‘관습헌법’으로 굳어졌다고 봐야 한다. 왕정체제에서 세자책봉과 같은 절차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김주애가 남자가 아니라서 가부장적인 북한사회에서 후계자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주장을 펴는 쪽이 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수령을 ‘어버이’로 부른다. 수령을 남녀로 구분하여 보는 것은 남성중심사고로 볼 수 있다. 최근 북한에서 여군들의 활약상을 보도하는 등 여성수령의 거부감을 해소하기 위한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후계를 서두르는 또 하나의 이유는 ‘김정은-김주애 공동통치’를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0대 후반에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등극한 김정은 총비서·국무위원장의 업무부담은 과중하다. 5년 단임의 남측 지도자가 5번 바뀔 동안 북한은 한 지도자가 계속 집권하고 있고 앞으로도 사망할 때까지 집권하게 된다. ‘혁명적 대가정’의 어버이로서 먹는 문제를 비롯해서 인민생활 전반을 만기친람(萬機親覽)하는 지도자의 업무부담은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딸 주애를 조기에 등장시켜 후계수업을 받게 하고 성인이 되면 당과 국가의 주요 직책을 맡아 국정 일부를 담당하게 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김일성 시대 ‘김일성-김정일 공동통치’를 시행한 적이 있다. 1964년 대학을 졸업한 김정일이 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들어가 후계수업을 시작하고 1967년 당내 유일사상체계 구축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4년 2월에 당 원로들로부터 당내 후계자로 추대됐다.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가 나은 김평일 등 이른바 ‘곁가지들’과의 후계경쟁에서 승리한 김정일은 당내 지지기반을 업고 실권을 행사했다. 남한으로 망명한 황장엽 비서의 증언에 의하면 1974년 2월부터 북한은 ‘김일성-김정일 공동정권’으로 운영됐다고 한다. 당내 후계지명 이후 김정일은 사상이론의 해석권을 부여받아 ‘주체사상의 김일성주의화’ 등 김일성이 ‘창시’했다는 주체사상을 ‘심화발전’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사상과 정치의 선도적 역할을 강조하는 사회주의국가에서 사상이론의 해석권을 장악했다는 것은 그가 곧 실권자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화된 이후 김정일은 국정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황장엽은 1985년 당 창건 40돌을 계기로 ‘김정일-김일성 공동정권’으로 권력이 역전됐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수령으로 상징적 권위를 행사하고 ‘조국통일의 구성’으로 주로 통일·외교 부문을 담당하고, 사상이론의 해석권을 장악한 김정일은 주체사상의 심화발전, 우리식 사회주의 등과 관련한 담화·논문을 발표하고 국정 전반의 실권을 행사했다.
김정일이 막후 실세로 활동하면서 북한은 36년 동안 당대회를 개최하지 못했다. 인민생활을 한 단계 끌어 올린 다음에 당대회를 개최해야 한다는 김일성의 ‘교시’를 실현하지 못해서 당대회를 열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김정일이 실권을 장악하고 ‘직할통치’를 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서 당대회를 개최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다. 공동통치 시기 김정일은 공개연설을 하지 않고 부인과 자식들의 존재를 외부에 드러내지 않았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 시대를 열었음에도 ‘은둔통치’로 일관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2008년 여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뇌졸중으로 건강이 악화되면서 김정은으로의 후계 구축 작업이 빨라졌다. 당대회를 열 여유가 없어 2010년 9월 당대회에 준하는 제3차 당대표자회를 열고 김정은을 후계자로 공식화했다. 김정일이 자기의 노력으로 후계자 지위에 올랐다면 김정은은 ‘혈통계승론’, ‘계속혁명론’ 등 선대의 후계구축과정에서 만들어진 후계자론에 따라 8세 때부터 ‘샛별대장’으로 불려지며 후계수업을 시작했다. 김정일의 갑작스런 건강악화로 권력승계가 빨라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김정은 집권 이후 고모부 장성택 당 행정부장이 권력을 장악하여 ‘섭정’을 시도하다가 ‘국가전복음모행위’를 한 죄명으로 처형당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서 장성택과 같은 야심가가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후계를 서두른 것으로 보인다.
김주애 등장 이후 북한이 사용하고 있는 호칭, 상징, 장군형 지도상 부각 등은 분명 후계와 관련이 있다. 지금은 김주애가 후계자로 간택돼 후계수업을 받으며 덕목을 쌓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후계수업을 받는 과정에서 후계자로서의 자질을 검증받고 성인이 되면 특정분야에서 통치수업을 하면서 공동통치기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그동안 외부세계가 북한지도자의 유고를 북한붕괴와 등치시켜 흡수통일을 말해왔다. 김주애를 조기에 백두혈통의 계승자로 내세움으로써 외부세계가 더 이상 정권붕괴와 흡수통일을 꿈꾸지 말라는 신호를 보낸 것인지도 모른다.
필자 주요 이력
▷전 통일연구원장 ▷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전 청와대 안보실 정책자문위원장 ▷현 국회 한반도 평화외교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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