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공급망은 더 이상 효율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 이재명 대통령이 베트남 현지에서 희토류와 요소수 공급망 협력 강화를 직접 언급한 것은 단순한 경제 메시지가 아니다. 한국 산업의 취약한 구조를 직시하고, 새로운 질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문제는 방향이 아니라 설계다. 이제는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공급망을 짤 것인가’의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우리는 이미 2021년 요소수 대란을 통해 공급망 리스크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경험했다. 특정 국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비용 절감이라는 장점을 제공했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산업 전체를 마비시키는 독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공급망 다변화’는 정책의 핵심 구호가 됐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선언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제는 구호를 넘어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은 분명 중요한 파트너다. 하지만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베트남을 ‘대체지’가 아닌 ‘핵심축’으로 삼는 전략이 또 다른 의존 구조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공급망 전략의 본질은 ‘분산’이 아니라 ‘통제 가능한 분산’이다. 특정 국가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도, 특정 국가에 집중하는 것도 모두 위험하다. 해법은 ‘다층 구조’다. 베트남을 제조와 조립의 핵심 거점으로 삼되, 희토류는 호주와 아프리카, 요소수 원료는 중동과 동남아 등으로 다변화하는 방식이다. 하나의 축에 집중하되, 여러 축으로 리스크를 분산하는 설계가 필요하다.
속도의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 지금 세계는 공급망 재편 경쟁을 벌이고 있다. 늦으면 기회를 잃는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단기간에 해결할 수는 없다. 특히 기술 이전과 같은 문제는 장기적 신뢰와 협상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전략은 단계적으로 나뉘어야 한다. 1단계에서는 생산기지 이전과 투자 확대를 통해 공급망의 물리적 기반을 확보하고, 2단계에서는 공동 연구개발과 기술 협력으로 질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속도와 지속 가능성은 충돌하는 개념이 아니라, 순서를 통해 조화시켜야 할 과제다.
더 중요한 문제는 리스크다. 원전과 LNG 발전소 같은 에너지 인프라 협력은 공급망 안정의 핵심이지만, 동시에 막대한 자본과 지정학적 위험이 수반된다. 이를 민간 기업에만 맡기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공급망을 국가 전략으로 규정한다면, 리스크 역시 국가가 일정 부분 분담해야 한다. 정책 금융, 수출신용 보증, 장기 구매 계약과 같은 장치를 통해 기업의 부담을 줄이고, 투자 유인을 만들어야 한다. 기업은 수익을 추구하는 주체이고, 국가는 안정성을 확보하는 주체다. 역할이 분리되어야 시스템이 작동한다.
결국 핵심은 거버넌스다. 공급망 재편이 선언에 그치지 않으려면 이를 강제하고 추적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공급망 전략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를 구축하고, 전략 자원 확보를 위한 국가 차원의 펀드를 조성해야 한다. 주요 프로젝트는 민관 합동으로 추진하되, 성과를 평가하고 보완하는 체계도 동시에 마련해야 한다. 투자 계획이 발표로 끝나지 않고 실제 실행으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구조가 필요하다.
기업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이재용, 구광모, 최태원 등 주요 기업인들은 이미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플레이어다. 이들의 투자는 단순한 사업 확장이 아니라 국가 전략의 일부가 되고 있다. 그러나 기업 혼자서 모든 리스크를 감당할 수는 없다. 정부의 전략과 기업의 실행이 맞물릴 때 비로소 공급망은 안정된다.
베트남 방문은 출발점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후의 실행이다. 공급망 재편은 선언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설계와 투자, 그리고 책임 있는 실행이 필요하다. ‘분산과 집중’을 동시에 설계하는 전략, 속도와 지속 가능성을 조화시키는 단계적 접근, 그리고 정부와 기업이 함께 리스크를 나누는 구조가 마련될 때 비로소 한국의 공급망은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늦출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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