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의 절차탁마] '노동' 프레임에 갇힌 노동절, 투쟁을 넘어 '행위'를 짓자

[이두수 작가]
[이두수 작가]

올해부터 5월 1일은 특별한 날이 되었다. '근로자의 날'이 '노동절'로 바뀌었다. 단순한 휴일을 넘어 국가 기념일이 된 것이다. 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존중하자는 의도는 좋으나, 명칭 변경 하나에 모든 것을 거는 듯한 사회 분위기는 일용직 노동자인 나로서도 다소 과잉되어 보인다.

지난해 국회는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 전부개정법률안'을 통과시켰고 법률 명칭은 '노동절 제정에 관한 법률'로 바뀌었다. 그동안 한국의 헌법과 법률은 오랫동안 '근로'라는 표현을 주로 써왔다. 국가 주도 경제성장기에 '부지런히 일하는 국민'의 이미지를 강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가 일하는 사람의 주체적 권리를 존중하는 방향에서 '근로'를 '노동'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사회적 논의가 오래 이어져 왔고 마침내 그 결과가 5월 1일 명칭 변경으로 매듭지어졌다.

역사적으로 보면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 노동자들이 결성한 ‘노동조합연합회’를 중심으로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싸워온 주체들이 스스로를 '근로자(부지런히 일하는 사람)'가 아닌 '노동자(나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주체)'로 명명한 점, 국제기구 ILO와 현대 인권 담론에서도 노동을 '상품'이 아닌 '인권'의 영역으로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점, 그리고 우리 헌법 제33조에서도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고 있는 것은 노동자가 사용자와 대등한 위치에서 자신의 조건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주체적 권리'를 법적으로 승인한 것이다. 즉 ‘노동'이라는 단어 속에는 '나는 단순히 시키는 대로 일하는 부품이 아니라 내 삶의 조건을 스스로 결정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인격체'라는 선언이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근로를 버리고 노동으로 대체하는 것은 일제의 흔적을 지운다고 하는 말이 들리는데 ‘근로’나 ‘노동’이나 둘 다 일본에서 빌려온 말이다.

서구의 'Lavor'를 '勞動'으로 번역한 사람은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지만 이는 19세기 말 근대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던 일본의 번역어 창출 과정에서 'Labor'가 '노동(勞動)'으로 정착되었고 우리말로 사용한 것은 구한말 지식인들이 일본 서적을 통해 이 번역어를 받아들이면서부터다.

한국에서 쓰는 노동은 그냥 움직일 동자를 쓰지만 일본에서는 '노동'을 쓸 때 '사람 인(人)' 변이 들어간 '일할 동(働)' 자를 사용한다. 일본인들은 단순히 물체가 움직이는 것(動)과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일하는 것(働)을 구분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노동'이라는 단어가 단순한 경제 활동을 넘어 주체적 권리와 인간 존엄의 상징이 된 배경에는 마르크스(Karl Marx)의 노동 가치설과 소외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르크스 이전의 노동이 그저 배를 채우기 위한 고통스러운 '고역'이었다면 마르크스는 노동을 인간의 유적 본질(Species-being)로 보았다. 동물은 생존 본능에 따라 움직이지만 인간은 머릿속으로 구상한 것을 현실로 만들어낸다. 마르크스는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행복을 느낀다고 보았다. 따라서 노동은 누군가에게 예속된 '근로'가 아니라 내 의지를 세상에 실현하는 주체적인 행위여야 한다는 논리가 여기서 나온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생산물, 노동 과정, 심지어 동료들에게서 격리되는 현상을 '소외'라고 불렀다. 시스템의 부품처럼 일하며 자아를 잃어버린 상태가 '근로'의 부정적인 단면이라면 이를 극복하고 자신의 노동력을 스스로 통제하려는 의지가 담긴 단어가 '노동'이다.

"노동이 모든 가치의 원천"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일하는 사람들이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고 사회의 주인으로서 목소리를 내는 강력한 이론적 무기가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근로'라는 말이 관용적으로 쓰이다가 1970~1980년대 민주화 운동 및 노동 운동이 격렬해지면서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비판 사회학이 대거 유입되었다. 이때 활동가들과 지식인들은 '근로자'라는 수동적인 용어를 거부하고 마르크스적 관점이 투영된 '노동자'라는 용어를 의식적으로 선택했다. 즉 우리가 현재 '노동'이라는 단어에서 느끼는 '투쟁, 권리, 주체성'의 이미지는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이 한국 노동 운동의 역사와 결합되며 만들어진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일하는 사람이 세상의 주인이다"라는 마르크스의 철학적 유산은 현재 어떤 현실을 만들었는가. 마르크스는 자본가(부르주아)가 생산수단을 독점하기 때문에 노동자가 소외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생산수단을 '국가'나 '공동체'가 소유하면 소외가 해결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자본가만 사라졌을 뿐이며 그 자리를 거대 국가 관료(Apparat)가 차지했다. 노동자는 이제 개별 기업주가 아닌 거역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국가 권력에 종속되었다.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기계 부품으로의 전락'이 국가적 규모로 일어난 셈이다. 현실은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이라는 구호는 현실 정치에서 노동자를 위로하는 슬로건이 아니라 노동자를 끊임없이 일터로 내모는 채찍이 되었다. 노동은 '권리'라기보다 국가 건설을 위한 '신성한 의무'로 강조되었고, 오직 국가 목표 달성을 위한 '성실한 근로'만이 강요되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노동'이라는 단어를 선호하는 이 흐름이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의 실패한 체제를 따르자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마르크스의 철학적 유산을 가장 잘 보존하며 주체적으로 발전시킨 북한은 단어의 '수사적 정의'와 '실제적 현실' 사이의 처참한 괴리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단어의 수사적 정의와 실제적 현실 사이의 괴리를 우리는 역사에서 충분히 보았다. 그러므로 단어를 바꾸는 일은 시작일 뿐이며 단어가 보장해야 할 실질적 삶의 질이 따라오지 않으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허상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적 현상을 보자. '노동'이라는 용어에 과도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실제 일터의 생산성이나 경제적 현실보다는 대립적 노사관계나 이념 과잉을 부추기고 있지 않은가. 단어만 바꾼다고 해서 일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단어 자체가 아니라 그 단어가 보장하는 실질적인 삶의 질이다. '노동'이라는 단어가 주는 정의로움에 취해 정작 노동 시장의 유연성, AI 시대의 일자리 변화, 세대 간 갈등 같은 실제적 문제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허상'을 쫓는 일이 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일하는 사람이 주인이다'라고 할 때 그 '주인'의 성격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마르크스가 말했던 '주인'의 본질은 집단이나 국가의 부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노동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이 만약 노동조합이나 국가가 개별 노동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전체(조직)를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또 다른 예속'이다.

주인은 권리만 갖는 것이 아니라 책임도 함께 진다.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를 스스로 정의하고, 기술의 숙련을 스스로 높이며, 동료와 함께 공적 공간을 짓는 사람. 나는 이 자리를 '장인-시민(artisan-citizen)'이라 부르고 싶다. 주인은 익명의 집단에 흡수되는 단위가 아니라 동료들과 말을 나누며 공적 공간을 함께 짓는 한 사람의 행위자(actor)여야 한다. 아렌트가 말한 Action은 본질적으로 복수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주의가 아니라 복수성(plurality) 속의 한 사람이다.

해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1958)에서 인간의 활동적 삶(vita activa)을 세 층위로 구분했다. Labor(노동)는 인간이 자연과 맺는 물질대사에 묶인 생존 활동이다. 먹고 자고 입는 일, 매일의 생계가 여기에 속한다. Work(작업)는 도구와 사물을 만들어 인공세계를 짓는 제작 활동이다. 다리와 건물, 책과 그릇이 이 영역에서 태어난다. Action(행위)은 타인과 말과 행위를 나누며 공적 영역에서 자유를 실현하는 가장 고차원적 활동이다. 정치, 약속, 시작이 여기에 속한다.

아렌트는 근대가 Labor를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았다는 점을 우려했다. 사회 전체의 역량이 정치적 행위나 창작이 아니라 오직 먹고사는 문제에 매몰될 때 우리는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의 사회'에 도착한다. 마르크스가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꿨다면 아렌트는 그 꿈이 Labor의 차원에 갇힐 때 사회가 활력을 잃는다고 경고했다.

여기서 한 가지 자기 점검이 필요한 지점이 있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만들어 낸 성과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물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스스로를 어떤 자리에 놓고 있는가. '투쟁하는 무산자' 프레임에만 갇혀 있다면 그것은 결핍을 정체성으로 삼는 일이 된다. 일의 가치를 높이는 것보다 더 많은 배분만을 요구하는 것은 전형적인 Labor 중심적 사고다. 노동조합과 정치권 모두가 개별 노동자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거대 조직으로 비대해진다면 그것은 단어를 바꾼 보람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다.

현재 한국의 노동운동이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전문가(Worker)'의 길을 제시하기보다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하며 '투쟁하는 무산자'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한 신호다. 일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힘으로 더 많은 배분을 요구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은 전형적인 'Labor 중심적 사고'다. 스스로 혁신할 능력을 상실한 집단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 시스템을 장악하려 할 때 사회는 활력을 잃고 경직된다.

비계 위에 올라가 안전벨트를 채우는 그 짧은 순간을 두고도 나는 가끔 묻는다. 이 동작은 해나 아렌트가 말한 노동(Labor)인가, 작업(Work)인가, 행위(Action)인가. 안전벨트가 단지 내 몸의 추락을 막는 도구일 때 그것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노동(Labor)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이 동료의 안전을 함께 점검하는 약속이 될 때 그것은 작업(Work)이 되고, 작업중지권을 동료들과 함께 행사하는 결단이 될 때 그것은 행위(Action)가 된다. 같은 안전벨트가 셋 다 될 수 있다. 결국 '누가 주인이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 주인이 어떤 가치를 지향하느냐'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생존 본능에 충실한 'Laborer'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책임지는 'Actor'가 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근로에서 노동으로 이름을 변경한 것은 시작일 뿐이다. 진짜 시험은 그 다음에 온다. 노동이라는 단어가 정치적 수사로만 소비될 것인가, 아니면 비계 위에서 안전벨트를 채우는 한 사람의 무게를 실제로 떠받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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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설명: 옥상 면갈이 작업은 위험하다. 그러나 전문가는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다. 위험을 인지하면서도 그 상황을 자기 손으로 주도할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이 어디서나 아름다운 까닭이다./ 이두수 작가 제공]

필자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노동자로 일하며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해 왔다. 현재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ADRF)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빈곤지역 아동들의 교육·급식·장학 지원을 이끄는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로, 건설현장에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 프로그램으로 펼치고 있다.
idoos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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