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은 학계와 정치권, 외교 무대를 두루 거치며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책임 있는 역할을 수행한 국가 원로였다. 1934년 개성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서울대, 미국 에모리대와 예일대를 거쳤고, 귀국 후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로 20년 동안 후학을 길렀다. 이후 노태우 정부의 국토통일원 장관, 김영삼 정부의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과 국무총리, 김대중 정부의 주미대사를 지내며 민주화 이후 세 정부에서 모두 중용된 드문 인물이었다.
그의 부음은 단순히 한 전직 총리의 별세 소식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산업화와 민주화, 분단과 냉전, 세계화와 외환위기의 격랑을 건너오는 동안 공적 언어의 품격과 국가 운영의 균형 감각을 지켜온 한 지성인의 퇴장을 뜻한다.
서울대 정치학과 강의실에서 그는 서양정치사상사를 가르친 대표적 학자였다. 플라톤에서 시작해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 로마의 공화정, 중세의 신학 정치, 근대의 사회계약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긴 흐름을 펼쳐 보이던 그의 강의는 한 편의 지적 드라마와 같았다고 회고된다. 강의는 박진감이 있었고, 학문은 품격이 있었으며, 말에는 힘이 있었다. 정치가 단순한 권력투쟁이 아니라 인간과 공동체의 운명을 묻는 학문이라는 사실을 그는 강단에서 먼저 보여준 사람이었다.
고인에게는 거대한 역사만이 아니라 작은 인간적 인연들도 함께 따라붙는다. 그의 아버님 출생지는 옛 주소로 경상북도 상주군 상주읍 오대리였다고 한다. 개성에서 태어나 예일에서 공부하고, 서울대 강단과 대한민국 총리실, 워싱턴 대사관까지 걸어간 인물의 뿌리 한편에 상주 오대리라는 소박한 지명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생애가 단지 권력과 직책의 기록만이 아니라 가족과 고향, 뿌리와 기억이 함께 엮인 한 인간의 긴 여정이었음을 일깨운다.
고인은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로 20년 동안 재직하며 한국 정치학의 기반을 다진 대표적 학자였다. 예일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서구 정치사상과 한국 정치 현실을 함께 읽을 줄 아는 드문 지식인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전쟁의 폐허와 권위주의, 냉전과 분단, 산업화와 민주화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이런 시대에 정치학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라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권력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자유와 질서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묻는 실천의 학문이었다. 이홍구의 정치학은 바로 그 지점에 있었다.
그가 공직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88년 노태우 정부 출범 때였다. 그는 국토통일원 장관을 맡으며 학자의 자리에서 국가 운영의 현장으로 나아갔다. 당시 그는 남북관계를 단순한 이념 대결로 보지 않았다. 냉전의 벽을 넘어 장기적이고 단계적인 한반도 질서의 재구성을 고민했다. 그가 제시한 ‘코리안 코먼웰스’ 구상은 훗날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뼈대가 되었다.
1989년 발표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고인의 대표적 공적 유산 가운데 하나다. 이 방안은 자주·평화·민주의 3대 원칙 아래 남북이 대립과 흡수의 논리를 넘어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느 한 정파의 독점적 구상이 아니라 여야 합의를 통해 마련된 통일 정책이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이홍구의 정치철학이 드러난다. 그는 통일을 선동의 언어로 말하지 않았다. 통일을 급진적 구호로 소비하지 않았다. 그는 통일을 제도와 합의, 평화와 민주주의의 언어로 설계하려 했다. 분단의 고통을 알면서도 조급하지 않았고, 통일의 당위를 믿으면서도 현실을 무시하지 않았다. 이것이 학자 출신 공직자의 힘이었다. 그는 감정보다 구조를 보았고, 구호보다 제도를 중시했으며, 대립보다 합의를 믿었다.
김영삼 정부에서 고인은 다시 통일원 장관 겸 부총리로 중용되었고, 1994년 12월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그 시기는 문민정부의 격동기였다. 군사 권위주의 이후 민주주의의 제도를 세우고, 세계화의 깃발을 들고, 남북관계의 가능성과 위기를 동시에 관리해야 했던 시기였다. 특히 1994년 남북 정상회담은 성사 직전까지 갔으나 김일성 주석의 급서로 무산됐다. 한반도 현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던 장면이었다.
그에게 총리직은 영광만의 자리가 아니었다. 그는 삼풍백화점 붕괴라는 참혹한 국가적 재난을 총리로서 감당해야 했다. 공식 만찬 도중 사고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갔다는 일화는 그가 책임을 말로만 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훗날 총리 재임을 돌아보며 “업적보다는 책임을 많이 느낀다”고 말했다. 이 한마디에 그의 공직관이 담겨 있다. 공직은 빛나는 자리이기 전에 책임지는 자리다. 권력은 행사하는 것이기 전에 감당하는 것이다.
고인은 1996년 신한국당 대표위원으로 정치에 입문했고, 제15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대선 경선에도 나섰으나 현실 정치의 높은 벽을 절감하고 중도에 물러났다. 그는 정책에 대해 토론하고 싶었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정책의 옳고 그름을 따져 묻는 경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이 말은 지금도 낡지 않았다. 오늘의 한국 정치도 자주 정책보다 진영, 설계보다 공격, 책임보다 표 계산에 기울어진다. 그래서 이홍구의 실패는 실패만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정치가 품격 있는 정책 경쟁을 얼마나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는지를 보여주는 증언이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고인은 또 한 번 국가의 부름을 받았다. 외환위기 직후의 대한민국은 국제 신인도 회복이 절박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신한국당 대표와 대선 경선 주자였던 그에게 주미대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정치적으로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국가의 위기 앞에서 개인의 불편을 뒤로했다. 보수 정당의 대표였지만, 진보 정부의 대사를 맡았다. 정파보다 국가를 앞세웠다. 자신의 정치적 이력보다 나라의 필요를 먼저 보았다.
이 대목이야말로 이홍구라는 인물의 크기를 보여준다. 그는 민주화 이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세 정부에서 모두 중용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처세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에게 정파를 넘어서는 신뢰가 있었고, 국가 운영의 균형감이 있었으며, 위기 앞에서 사사로운 이해를 내려놓을 수 있는 공인의 자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인의 보수주의는 좁은 진영의 보수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품격의 보수주의, 절제의 보수주의, 제도의 보수주의였다. 그는 분노를 정치의 에너지로 삼기보다 합리성을 정치의 기준으로 삼으려 했다. 갈등을 키우기보다 조정하려 했고, 이념의 과잉보다 책임의 균형을 중시했다. 오늘의 분열된 정치 현실에서 그의 보수주의가 더 크게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수란 과거에 매달리는 태도가 아니라, 공동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제도와 책임을 지키는 자세다. 이홍구는 그것을 몸으로 보여준 정치인이었다.
공직을 마친 뒤에도 그는 침묵하지 않았다. 중앙일보 고문으로 활동하며 ‘이홍구 칼럼’을 연재했고, 정치 현안과 남북관계, 외교 문제에 대해 품격 있는 조언을 이어갔다. 또한 서울국제포럼을 통해 국제정세와 외교안보 현안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공부하는 원로였고, 말하는 지식인이었으며, 대화의 장을 지키는 어른이었다.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분권과 대화였다. 대통령에게 지나치게 집중된 권한을 나누어야 국가 전체의 역량이 오히려 커진다고 보았다. 이는 단순한 개헌론이 아니었다. 권력의 절제와 책임의 분산을 통해 민주주의를 더 튼튼히 하자는 구상이었다. 그는 강한 지도자보다 지속 가능한 제도를 믿었다. 사람의 선의보다 제도의 균형을 중시했다. 그것은 정치학자의 직관이자 공직자의 체험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이홍구 전 총리는 참으로 드문 유형의 지도자였다. 학문이 정치로 갔으나 학문을 잃지 않았고, 권력의 중심에 섰으나 품격을 잃지 않았으며, 정당정치에 몸담았으나 국가 원로의 균형을 잃지 않았다. 그에게는 거친 선동의 언어가 없었다. 대신 깊은 설득의 언어가 있었다. 그에게는 군림의 태도가 없었다. 대신 경청의 자세가 있었다. 그에게는 승부사의 냉혹함보다 선비의 절제가 있었다.
오늘 우리는 한 사람의 정치인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한 시대의 정치 교양을 떠나보내고 있다. 그는 대한민국이 전쟁과 분단, 권위주의와 민주화, 냉전과 탈냉전, 외환위기와 세계화의 길을 지나오는 동안 여러 자리에서 조용히 그러나 책임 있게 서 있었다. 언제나 중심을 잡으려 했고, 언제나 균형을 찾으려 했고, 언제나 국가의 장기적 지속 가능성을 생각했다.
고인의 삶은 오늘의 정치에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정치는 무엇인가. 권력은 무엇을 위해 쓰여야 하는가. 이념은 공동체보다 앞설 수 있는가. 말은 사람을 상처 내기 위한 무기인가, 아니면 사회를 설득하기 위한 다리인가.
이홍구의 생애는 이 질문들에 조용히 답한다. 정치는 대립을 관리하는 기술이며, 권력은 책임을 감당하는 자리이고, 이념은 국가를 위한 도구이지 국가를 찢는 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말은 품격을 잃지 않을 때 비로소 공적 언어가 된다.
개성에서 태어나 예일에서 공부하고, 서울대에서 가르치고, 청와대와 총리실과 대사관을 거쳐 언론과 포럼의 자리까지 걸어간 그의 생애는 결국 한 인간의 긴 여정이었다. 그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권력의 크기보다 품격의 크기를 기억한다. 직책의 높이보다 책임의 깊이를 기억한다. 정치의 승패보다 공적 언어의 격조를 기억한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이제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남긴 공적 언어의 품격, 합리주의의 태도, 제도에 대한 믿음, 국가를 먼저 생각한 책임의 정치는 오래 남을 것이다. 분열의 시대일수록 그의 절제가 그립고, 소음의 시대일수록 그의 차분한 목소리가 그립다. 그는 정치의 전장에서 소리 높인 사람이 아니라, 역사의 고비마다 중심을 잡으려 한 사람이었다.
영원한 신사, 이홍구 전 총리.
학자이자 공직자, 외교가이자 국가 원로였던 고인의 삶에 깊은 존경을 바친다.
고인의 영면을 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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