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도 전 중소벤처기업부 차관/논설고문]
국가 안보의 최전선이 총성 없는 전쟁터, 즉 ‘경제’로 완전히 이동했다. 군사력이 국가의 생존을 담보하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첨단 반도체 라인의 가동률과 핵심 광물의 확보 여부가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한국의 경제안보 정책 역시 이러한 시대의 격랑 속에서 그 형태와 목표를 끊임없이 진화시켜 왔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 초반은 한국 경제안보의 맹아가 움트던 시기였다. 필자가 당시 상공부(현 산업통상부)에서 첫 근무를 시작하며 맡은 업무가 바로 미국 정부와 협의해 한국에 ‘전략물자수출통제제도(일명 COCOM 체제)’를 신설하는 일이었다. 당시 한국은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자체적인 기술력을 축적해 나가고 있었고, 우리 기술과 물자가 적성국이나 우려 국가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요구와 내부적 각성이 교차하던 시점이었다.
당시 경제안보는 다분히 ‘방어적’이었다. 상공부 주도로 전략물자 수출통제의 틀을 짜는 한편 과학기술부, 국가안전기획부 등과 긴밀히 공조하여 전략기술 유출 보호 규정을 만들었다. 어렵게 마련한 규정과 가이드라인을 들고 전국의 기업 현장을 돌며 “우리의 피땀 어린 첨단 기술이 해외로 빠져나가면 국가적 손실이자 기업의 존립이 흔들린다”며 보안의 중요성을 목이 터져라 전파했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기업들은 전략물자나 기술 보호를 귀찮은 규제 정도로 여기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이 오늘날 IT 강국, 제조 강국 대한민국을 지켜낸 든든한 방어막의 시작이었다.
이제 자원과 기술은 그 자체로 무기가 되었고 상호의존성은 언제든 목을 옥죄는 족쇄가 될 수 있다.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초격차를 유지하는 것 못지않게 이들 산업을 굴러가게 하는 희토류, 핵심 광물,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의 공급망을 '어떻게 다변화하고 복원력을 갖출 것인가'가 핵심 과제로 부상했다.
30여 년 전 기업들에 “기술을 뺏기지 말라”고 강조했던 필자의 외침은 이제 국가 차원에서 “공급망이 끊기지 않게 하라”는 지상 과제로 바뀌었다. 미국이 칩스법(CHIPS Act)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통해 동맹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을 강제하고, 중국이 핵심 광물 수출 통제로 맞불을 놓는 신냉전의 한복판에서 한국의 입지는 여전히 위태롭다. 대외 의존도가 압도적으로 높은 우리 경제 체질상 공급망 교란은 곧 경제의 심정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제 ‘경제안보’는 추상적인 정책 용어가 아니다. 에너지 수급, 핵심 부품 확보, 첨단기술 보호, 해상 물류 유지, 전략 물자 비축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국가 생존 전략이다. 누가 더 싸게 사느냐보다 누가 더 안정적으로 확보하느냐가 국가 경쟁력을 가르는 시대다. 진정한 경제안보 강국으로 거듭나기 위해 정부와 기업은 과거와 차원이 다른 정교한 대응 전략을 실행해야 한다.
위기가 터진 뒤 부랴부랴 매점매석을 단속하고 비상 TF를 꾸리는 식의 ‘사후약방문’으로는 늦다. 정부는 선제적인 ‘전략적 설계자’로 나서야 한다. 첫째, 원자재 가격, 해상운송, 통관, 재고 수준, 특정국 수출규제 동향 등을 실시간으로 살피는 조기경보 체계를 정교하게 구축해야 한다. 공급망 위기는 갑자기 터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전에 위험 신호를 보내오는 경우가 많다. 둘째, 에너지와 식량, 핵심 광물, 의약품 원료 등 필수 산업소재의 전략 비축 체계를 실질화해야 한다. 평상시의 비용이 위기 시에는 국가 전체를 지키는 보험이 된다. 셋째, 특정 국가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품목은 수입처 다변화와 국내 생산 기반 확충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넷째, 산업부나 관세당국을 넘어 외교, 금융, 과기, 보건당국이 하나로 움직이는 통합형 대응체계가 필수적이다.
기업 역시 낡은 경영 공식을 바꿔야 할 때다. 첫째, 비용 절감과 재고 최소화에만 집중하던 관성에서 벗어나 ‘공급 지속성’을 경영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가장 먼저 핵심 원료와 부품의 공급처를 다변화하여 단일 국가·업체 의존의 위험을 끊어내야 한다. 둘째, 공급 중단 시 생산 전체가 멈출 수 있는 핵심 품목에 대해서는 반드시 일정 수준의 안전재고를 확보해야 한다. 셋째, 1차 협력사를 넘어 2차, 3차 협력사의 리스크까지 꿰뚫어 보는 공급망 가시성을 갖춰야 한다. 아래 단계에서 원료가 막히면 전체 시스템이 흔들리고 기업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넷째, 전쟁이나 수출통제 등 다양한 위기 상황을 상정한 업무연속성계획(BCP)을 내재화해야 한다. 준비된 기업만이 납기를 지키고 고객 신뢰를 유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AI와 빅데이터를 활용해 전체 공급망과 리스크를 실시간으로 관리하는 디지털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
물론 공급망 안정이 곧 닫힌 보호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국내에서만 만들 수도 없다. 현실적인 해법은 신뢰할 수 있는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하고, 특정 지역에 집중된 공급망을 분산하는 것이다. 개방은 유지하되 취약한 개방을 ‘안전한 개방’으로 체질 개선하는 과정이다.
30여 년 전 전국을 돌며 첨단기술 보유 기업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기술 보안을 설득하던 그 시절의 치열함은 지금도 유효하다. 다만 전선이 확장되었을 뿐이다. 과거 상공부, 과기부, 안기부가 원팀을 이뤄 국가 기술을 지켜냈듯이 이제는 범정부적 역량과 기업의 민첩성이 결합된 ‘K-경제안보’ 모델을 완성해야 한다. 기술 유출이라는 ‘나가는 문’을 단속하는 철통같은 수비를 넘어 필수 자원이 들어오는 ‘길’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능동적 공격수 역할, 그것이 격변하는 신냉전 시대에 대한민국 경제의 내일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김학도 필자 주요 이력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 정치경제학 박사 △전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자원실장 통상교섭실장 △전 중소벤처기업부 차관 △전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이사장 △현 한국협업진흥협회 회장 △현 충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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