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 유라시아 시대를 향한 한국의 전략적 전환이 절실한 때다. 북·중·러 삼각관계는 빠르게 재편되고, 북한은 러시아와 사실상 군사동맹 수준으로 밀착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과의 전략경쟁 속에서 준(準)동맹적 협력 구조를 굳혀가고 있다. 이 같은 지각변동 앞에서 한국은 한미동맹이라는 단일 축에만 의존한 채, 러시아와의 관계를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방치가 단순한 외교적 소홀함이 아니라, 한국의 미래 전략 전체를 제약하는 구조적 위험으로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멈춘 북방외교의 시계가 다시 돌려야 한다. 한국 정부는 북·러 밀착과 북·중·러 협력 가능성을 한·미동맹과 한·미·일 안보협력의 강화 지표로만 삼아서는 안 된다. 지금 한국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재설계하지 않는다면, 북핵 문제에서도, 유라시아 경제에서도, 에너지·물류 전략에서도 우리는 운신의 공간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한반도 안보 구조에도 불안정을 초래할 것이다. 북핵 문제는 이미 미국·중국·러시아가 모두 얽힌 다자 구조다. 그런데 한국이 러시아와의 통로를 스스로 닫아버리면, 북핵 문제에서 한국은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해결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국가가 될 것이다.
유라시아 경제·에너지·물류 전략에서도 한국은 뒤처지고 있다. 러시아는 북극항로, 시베리아 에너지·광물, 유라시아 철도를 비롯, 극동 개발의 핵심축이다. 한국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방치하면, 유라시아 전체가 한국에게 닫히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는 단순한 외교 문제가 아니다. 한국 경제의 미래 성장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같다. 중국과 일본은 이미 북극항로와 러시아 극동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유럽 국가들조차 전후(戰後) 재건을 염두에 두고 러시아와의 경제적 연결고리를 끊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제재와 안보 프레임에 갇혀 미래의 기회를 현재의 공백으로 바꾸는 실수를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한국은 지금이라도 다음과 같은 협력을 서둘러야 한다. 첫째, 러시아와의 물리적 연결이다. 한·러 직항노선부터 재개하는 것을 서두를 필요가 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TSR) 활용을 위한 협력도 필요하다. 러시아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해 현대화한 대륙횡단철도를 통해 한국과 육로 물류망 연결을 구상하고 있다. 북극항로와 연결도 필수적이다. 북극항로가 녹으면서 기존 태평양·인도양 항로 대비 운송 거리가 약 40% 단축되는 효과가 기대된다. 이를 위해 내구성이 강한 특수 선박 건조 기술을 가진 한국의 조선업과 세계적인 환적항인 부산항의 인프라가 필수적이다. 러시아는 이 항로의 핵심 해역을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한국이 참여하지 않으면 미래 물류 경쟁에서 구조적으로 뒤처질 수밖에 없다.
둘째, 기후·환경 협력이다.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산림·영토를 보유한 기후 대국이다. 북극권 환경 변화의 직접 당사자다. 한국이 기후 위기 대응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확보하려면, 러시아와의 공동 연구·환경 모니터링과 탄소흡수 관련 협력이 필수적이다. 셋째, 극지 연구다. 극지는 미래 에너지·광물·기후 연구의 보고다. 러시아는 북극권 연구 인프라를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다. 한국이 극지 과학기술에서 선도적 위치를 확보하려면 러시아와의 공동 탐사·데이터 공유·기지 활용 협력이 필수적이다. 넷째, 극동 농업·수산 협력이다. 러시아 극동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미개발 농지와 풍부한 수산자원을 가진 지역이다. 한국의 식량안보·수산자원 확보·농업 기술 수출을 위해서는 북한과도 함께 참여하는 전략적 협력이 필요하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한국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우 전쟁 이후 러시아는 자국의 경제 재건을 위해 서방 세계와의 관계 회복이 필요하지만, 나토 국가들과는 적대감이 깊다. 일본은 영토 분쟁으로 인해 관계 개선이 요원하다. 중국은 몽골과 같은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하고 실질적 파트너는 한국뿐이다. 특히, 시베리아 횡단 철도 활용과 북극항로의 개척, 에너지 파이프라인 연결에서 한국은 러시아에게 필요한 새로운 소비처가 될 수 있다. 한국은 러시아의 경제적 돌파구를 마련해 줄 수 있는 핵심적인 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러시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고급 인력과 기술을 제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가 한국이다.
남한은 노태우 정부의 '북방 정책'을 시발점으로 하여 소련, 중국 등과 수교하며 경제 협력을 대폭 확대했다. 이를 통해 동유럽, 중앙아시아로 외교 지평을 넓혔다.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중국·러시아와 긴밀히 연결되는 실용적이고 다각적인 외교를 펼쳐왔다. 과거처럼 어느 한쪽 편을 드는 것이 곧 선이고, 반대편은 악이라는 식의 가치 판단은 시대착오적이다. 외교의 핵심은 국익 최우선이다. 탈 이념적 실용주의를 지향해야 한다. 한국은 이제 강력한 국방력과 경제력을 갖춘 국가가 되었다. 동맹이라 할지라도 필요시 '노(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적대국이라도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한·러 관계는 북·러 군사협력, 우크라이나 전쟁, 서방 제재 등으로 인해 더 나빠지지 않게 관리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북한은 러시아와 전략적 공간을 확대하고 있는데, 한국은 러시아와의 외교·경제·북방협력 공간을 스스로 좁히고 있는 상황이다. “한·러 관계를 어떻게 재설계할 것인가?”와 같은 전략적 질문은 거의 공론화하고 있지 않다.
한·러 관계 복원은 한국의 미래를 북쪽으로 확장하는 전략적 선택이다. 지금 한국의 젊은 세대는 일자리, 주거, 성장 기회 및 산업의 미래 모두에서 벽을 마주하고 있다. 한국이 러시아·중앙아시아·몽골·북극권과 연결되는 순간, 한국 청년의 기회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열린다. 지금 필요한 것은 두려움의 외교가 아니라, 미래를 여는 외교다. 한국이 북방 유라시아 시대를 향해 나아갈 용기를 낼 때, 우리는 비로소 미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필진 주요 이력
▷독일 브레멘대학 세계경제연구소 연구원 ▷통일연구원 북한경제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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