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렬의 인사이트] 투키디데스 함정인가 킨들버거 함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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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렬 전 대사: 필명 이창천]

 
“내 기록은 당장 듣기에는 재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일시적인 구경거리가 아니라, 영원히 남을 자산이 되기를 바라며 썼다.”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안에 남긴 말이다. 전쟁은 기원전 431년에서 404년까지 이어졌다. 투키디데스는 전쟁 발발 직후부터 400년 경 그가 죽을 때까지 책의 완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책은 411년의 시점에서 갑자기 중단된 미완성 본으로 남았다. 1권 23장에 결론이 나온다. “아테네의 힘이 커졌고, 그 힘이 스파르타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으며, 바로 그것이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정치학자이자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방부 정책 및 전략 담당 차관보를 지낸 그레이엄 앨리슨이 2015년 9월에 발표한 논문 “투키디데스 함정: 미중은 전쟁으로 치닫는가?”에서 현대적으로 유행시킨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두 세력의 불가피한 충돌 경향이다. 그는 지난 500년간 기존 강대국과 부상 강대국이 충돌한 16개 사례 중 12개가 전쟁으로 끝났다고 분석하면서, 중미관계도 그런 구조적 위험 속에 있다고 봤다. 그러나 전쟁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은 아니다. 16개 중 4개 사례는 전쟁을 피했다.
 
15세기 후반 기존 강대국 포르투갈과 신흥 강대국 스페인이 부딪히지만,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세계를 양분하며 충돌을 피한다. 20세기 초 영국과 신흥 미국이 대치하지만, 영국은 독일 등 유럽 위협에 집중하기 위해 미국과 충돌하지 않고 양보한다. 이른바 ‘영미 대화해’(Great Rapprochement)다. 1940~1980년대 미국과 소련의 냉전도 “뜨거운 전쟁”으로 폭발하지는 않는다. 1990년대 이후 영국·프랑스와 독일의 긴장이 있었지만, 독일은 군사적 패권이 아니라 유럽통합, EU, 유로존, 경제적 리더십을 통해 힘을 행사함으로써 전쟁을 피한다.
 
시진핑이 투키디데스 팬이다. 그는 미국 대통령 두 사람에게 연속해 “투키디데스의 함정” 메시지를 던졌다. 엄밀히 말하자면 맞지 않는 비유다. 왜냐면 신흥국 아테네는 기존 강국 스파르타에 패배했기 때문이다. 신흥 중국이 기존 미국한테 결국 진다는 비유인 셈이다. 그래서 시진핑의 투키디데스 함정 비유는 두 강국이 함정에 빠지지 말자는 얘기에서 끝나야 한다.
 
먼저 2024년 11월 페루 리마 APEC 계기에 시진핑은 바이든에게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역사적 필연이 아니”라면서 “신냉전은 해서는 안 되고 이길 수도 없으며, 중국 봉쇄는 현명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국 “통합억제”(integrated deterrence) 전략은 동맹과 파트너의 네트워크를 한데 묶어 상대의 군사행동을 억제한다는 것이었고 중국은 이를 봉쇄로 해석했다.
 
시진핑의 두 번째 투키디데스 함정 강의가 2026년 5월 14일 트럼프를 상대로 한 것이다. 시진핑은 트럼프에게 “중국과 미국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넘어설 수 있는가, 새로운 대국관계 패러다임을 만들 수 있는가, 세계에 더 큰 안정을 제공할 수 있는가”가 역사와 세계와 인민이 던지는 질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답으로 “건설적인 전략적 안정 관계”를 제시했다. 시진핑이 바이든에게 한 발언이나 트럼프에게 한 말은 본질적으로 같다. 중국의 부상과 핵심이익을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다. 앨리슨이 거론한 네 번의 성공 사례처럼 중국과 미국도 건설적인 역사경로를 취해야 하지만, 충돌한다 해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의 자신감이다.
 
시진핑이 보기에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담론은 중국 외교수사에 매우 쓸모가 있다. 첫째, 이 말은 중국을 자동으로 미국과 맞먹는 대국 자리에 올려놓는다. 기존 패권국 미국 대 신흥 강대국 중국이다. 둘째, 책임의 방향을 미국 쪽으로 돌릴 수 있다. 투키디데스 원문에서 전쟁의 결정적 원인은 아테네의 성장이 스파르타에 불러일으킨 두려움이었던 것처럼, “중국의 발전이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 중국의 발전을 두려워하고 봉쇄하려는 것이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위협과 평화 메시지를 동시에 담을 수 있다. “전쟁은 피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미국이 오판하면 진짜 함정에 빠진다”는 경고가 들어 있다.
 
그러나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문제의 절반만 보게 만든다. 미국과 중국이 충돌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킨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질서의 더 근본적인 문제는 누가 무역질서, 금융안정, 기후위기 대응, 해상교통로의 안전, 국제기구의 운영 같은 세계 공공재의 비용을 떠맡을 것인가에 있다. 전쟁은 나지 않아도 질서는 무너질 수 있다.
 
이 질문에 ‘킨들버거 함정’이 답한다. 미국 경제사가 찰스 킨들버거의 이름을 딴 명칭이다. 그는 대표작 『대공황의 세계 1929–1939』에서 1930년대 대공황이 그렇게 깊고 오래간 이유를 세계경제를 안정시킬 지도국 부재에서 찾았다. ‘킨들버거 함정’이라는 표현을 만든 사람은 조지프 나이 교수다. 나이는 2017년 1월에 발표한 글 <킨들버거 함정>에서 이 말을 현대 중미관계에 적용했다. 나이의 요지는 “중국이 너무 강해서도 위험하지만, 세계 공공재를 제공할 만큼 충분히 책임 있는 강대국이 되지 못하는 것도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나이는 미국이 중국을 두려워해서 전쟁으로 가는 투키디데스 함정도 피해야 하지만, 중국이 세계질서의 비용을 부담하지 않는 킨들버거 함정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지금 자유주의 세계질서 안에서 자기 영향력을 키우려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고 고립시키면 중국은 책임 있는 공동관리자가 아니라 파괴적 무임승차자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이의 해답은 중국 봉쇄가 아니다. 중국을 기존 국제질서 밖으로 밀어내지 말고 그 안에서 더 많은 책임과 비용을 부담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국은 첫째, 중국을 너무 두려워해 군사충돌로 밀려들어가면 안 된다. 이것이 투키디데스 함정 회피다. 둘째, 미국은 중국을 고립시켜 세계질서의 무책임한 방관자나 교란자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 이것이 킨들버거 함정 회피다. 셋째, 미국 자신도 세계질서 유지 책임에서 손을 떼면 안 된다. 영국이 약해지고 미국이 책임을 회피했던 1930년대의 반복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킨들버거의 함정은 미국에 불편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미국이 지금 스스로 극단적 거래주의, 보호주의, 일방주의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동맹을 수탈하고 있으며 국제기구를 불신하고 관세를 남발하며 달러와 제재권력을 과도하게 정치화하면서 자기 스스로가 만든 질서를 허물고 있다. 중국이 그 빈자리를 채우든 아니든 질서 붕괴의 책임은 미국에 있다. 킨들버거 함정의 가장 나쁜 시나리오는 단순한 미중전쟁이 아니다. 전쟁 없이도 질서가 무너지는 상황이 최악이다. 미국은 질서 유지에서 손을 떼고, 중국은 그 질서를 책임 있게 떠맡지 않아 세계가 불안정해지는 것이다. 지금의 세계가 정말 위험한 이유는 두 함정이 동시에 작동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2017년 11월 트럼프의 베이징 국빈 방문 시 양 정상은 미중관계의 균열을 ‘거래’로 봉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2026년은 그 균열을 더 이상 없앨 수 없으니 ‘관리’하자는 회담이었다. 양국관계의 관리도 중요하지만 세계 질서의 관리도 긴요하다. 중국은 이제 미국의 역할을 기대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스스로가 질서의 관리자가 되는 지혜와 용기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물론 미국이 해온 것처럼 자기중심적이고 폭력적인 패권은 버리고 ‘선의의 리더’가 되는 길을 택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 세계가 중국에 바라는 것임을 중국은 직시할 일이다.

필자 소개 

직업 외교관으로 일했다. 1985년에 외무부에 처음 들어간 이후 약 15년 이상을 해외에서 지냈다. 보스턴, 파리, 텔아비브, 하노이, 워싱턴, 비슈케크(키르기스스탄), 바르샤바, 루안다(앙골라)가 그의 활동 공간이었다. 1962년에 태어난 저자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에 곧바로 외무부에 입부했다. 자연히 외무부 내 경력도 경제외교 분야에 집중되었다. 코이카 창설, 우리나라의 OECD 가입, 한·미 FTA 협상 과정에 관여했다. 아울러 한·미 원자력협정을 협상했고, 보건복지부에서 국제협력 업무를 총괄했으며, 2014년부터 2년간 앙골라에서 대사로 일했다. 이후 2018년 6월 외무부를 퇴직하고 국제기구인 세계스마트시티기구(WeGO) 사무총장으로 행복도시를 창조하는 도시외교를 추진했다. 2021년 6월 말로 지난 36년간 공직을 모두 마친 저자는 지금은 이창천이라는 필명으로 시, 소설, 에세이, 칼럼, 인류문명 비평서 등을 쓰는 작가로서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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