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
메모리 초호황의 설계자는 한국이 아니다
1년 전 만 해도 한국 메모리 반도체 이대로 가면 망한다고 했다. 지금은 사상 최대 영업이익이다. 그러나 한국 메모리 반도체의 드라마틱한 반전에 환호하기는 이르다. 이 호황의 설계자가 한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중 AI 군비경쟁이 뿌린 투자 폭탄, 미국이 중국에 씌운 반도체 금수(禁輸)조치의 반사이익이 만들어준 선물이다. 우리가 잘 해서가 아니라 남들이 싸워준 덕에 고기가 그물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운(運)을 실력(實力)으로 착각하는 순간, 역사는 어김없이 청구서를 들이밀었다.
중국의 “식칼 신공”을 비웃지 마라
한국이 잡은 고기 나누는 데 혈안인 그 시간, 중국 화웨이는 EUV 장비 없이 돌아가는 새로운 반도체 공법을 실험하고 있다. 중국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회칼이 없으면 식칼로 회를 뜨는 나라다. 막히면 뚫고, 3년이면 배춧값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지금 중국의 실력이다. 화웨이의 로직 폴딩(Logic Folding) 공법은 EUV 없이도 트랜지스터 밀도를 단숨에 55% 끌어올렸다. 식칼 신공이 회칼을 위협하고 있다.
중국이 사람이 없어 조명이 필요 없는 완전 무인 자동화 공장, '불 꺼진 공장(Dark Factory)'을 전 산업에 도입하는 동안, 한국에서는 로봇을 들이면 라인을 세우겠다는 노조와 성과 배분 없이는 파업하겠다는 노조가 동시에 큰소리를 낸다. 선거철 표심에는 영혼도 파는 정치는 수수방관한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반도체 계약학과가 수억 원 성과급 소식에 갑자기 인기 폭발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의대 바람에 정원도 채우지 못하던 학과가 하루아침에 최고 인기학과로 뒤집혔다. 인재를 국가 전략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시장 가격이 키운다. 시장이 틀리는 순간 인재 파이프라인도 함께 무너진다는 것을 우리는 반도체 불황 시절에 이미 학습했다.
NATO AI 공화국, 구호는 있고 전략은 없다
'세계 3대 AI 강국'을 입에 달고 다니지만 한국의 AI는 “No Action, Talking Only”, NATO다. 호텔과 강당에서 포럼을 열고 보도자료를 뿌리는 AI다. AI 정책을 맡으라고 임명한 AI 수석이 1년도 안 돼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자리를 던지고 나가는 나라에서, 국가 AI 전략은 선거 시즌용 공허한 의제로 소비된다. 국가 대계(大計)보다 개인 대계(大計)가 먼저인 정책결정자들에게 100년 전략을 기대하는 것이 애초에 무리였을까.
요즘 유행어는 '소버린 AI'다. 주권 AI를 갖겠다는 구호다. 그런데 미국과 중국은 이미 에이전트 AI, 피지컬 AI로 한 판 끝내고 다음 판을 벌이고 있다. 한국이 소버린 AI 선언문을 다듬는 동안, 중국은 사람이 필요 없어 불을 켤 필요조차 없는 '다크 팩토리'를 전 산업으로 확산시키고 있다. AI가 설계하고, 로봇이 조립하고, 알고리즘이 품질을 검사한다. 작업자도, 관리자도, 전등도 없다.
냉정하게 보자. 지금 반도체와 축구를 빼면 중국보다 잘하는 것이 없어진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중국이 전 산업에 다크 팩토리를 장착하고 지금보다 40~50% 낮은 원가로 제품을 들이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그 순간 폭등했던 주가는 제자리로 돌아가고, 실업률은 치솟고, 내수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진다. 산 너머에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데, 폭풍이 오는지도 모른 채 갑판에서 싸움만 하는 선원들처럼 한국은 성과급 계산기를 두드리느라 고개를 들 틈이 없다.
73일마다 판이 바뀐다
버크민스터 풀러의 지식 배증 곡선이 말한다. 산업시대엔 100년마다, 반도체 시대엔 18개월마다, 인터넷 시대엔 12개월마다 정보량이 2배가 됐다. AI시대는 73일이다. 더 무서운 것은 속도가 아니다. 지식을 만드는 주체가 인간에서 AI로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AI가 논문을 쓰고 코드를 짜고 데이터를 생성하는 세계에서, 강산이 변하는 속도 자체가 73일마다 2배씩 빨라진다.
시대별 승자의 조건은 이렇게 바뀌었다. 제조시대엔 큰 자가, 정보시대엔 빠른 자가, 네트워크시대엔 친구 많은 자가 이겼다. AI시대엔 학습하는 자가 이긴다. 기계의 학습(데이터 피드백 루프), 조직의 학습(실험 속도), 개인의 학습(질문력) 이 세 겹의 학습이 동시에 작동하는 기업과 국가가 승자다.
AI시대의 규모는 공장과 자본이 아니라 컴퓨팅·데이터·에너지다. 속도는 생산 속도가 아니라 학습-실험-수정의 사이클 속도다. 73일마다 AI 능력이 2배가 되는 세계에서 6개월짜리 전략은 발표 시점에 이미 낡아 있다. AI시대의 문해력은 '잘 읽고 잘 쓰기'가 아니라 '잘 묻기'다.
물 들어올 때 그물을 짜라
공급부족이 만든 호황은 언제나 캐파 증설로 꺼진다. 사상 최대 마진이 터지는 메모리 시장에 미국·일본·대만·중국이 다시 뛰어들고 있다. 지금의 초호황은 초겨울 살얼음처럼 두께가 얇다. 선발자 우위는 놀다 보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어떤 산업도 불황 없는 슈퍼사이클은 없다.
해법은 하나다. 물 들어올 때 고기 잡되, 더 큰 그물을 짜야 한다. 잡은 고기 나누는 데만 한눈 팔다 가는 다음 사이클에서 울게 된다. 메모리 호황이 주는 이 마지막 기회에, 컴퓨팅·데이터·에너지·인재, 즉 AI시대 생존의 4대 기반을 화끈하게 확충해야 한다.
농업시대에 태어나 제조시대에 공부하고 정보화시대에 일한 기성세대 정책결정자들이 AI시대를 설계하고 있다. 이런 정책결정자들의 진정한 각성 없이는, 한국의 AI 3강 꿈은 영원히 호텔 세미나로 끝난다.
“知AI·用AI·克AI”, AI를 알고, AI를 부리고, AI에게 먹히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메모리 초호황 속 한국이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은 성과급 계산기가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전병서 필자 주요 이력
▷칭화대 석사·푸단대 박사 ▷대우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반도체IT 애널리스트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겸임교수 ▷중국경제금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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