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많은 길에서 어깨가 스칠 순 있다. 지하철역, 횡단보도, 번화가, 관광지. 우리는 매일 누군가의 몸 옆을 지나간다. 조금 비키고, 살짝 피하고, 괜찮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지나간다.
그런데 일부러 몸을 틀어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데도 피하지 않고, 약한 사람을 골라 어깨를 밀고 지나간다. 일본에서 부츠카리(ぶつかり)라고 불리는 행위다. '부딪치다'는 뜻의 일본어 '부츠카루'에서 나온 말로, 우리식으로 말하면 길거리 '어깨빵'이다.
▲ 우연처럼 보이도록 설계된 충돌
최근 이 현상은 한국에서도 주목받았다. 걸그룹 리센느 멤버 원이와 미나미가 일본 도쿄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에서 촬영하던 중 한 남성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다가왔고, 미나미가 몸을 틀어 피하는 장면이 포착된 것. 남성은 그냥 지나간 것이 아니라, 굳이 그쪽으로 몸을 밀고 들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유튜버 육은영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일본 오사카 거리에서 동행 여성이 한 남성과 어깨를 부딪힌 뒤, 해당 남성이 다른 여성들에게도 의도적으로 부딪히며 지나가는 장면을 확인했다. 육은영이 남성 앞을 막고 항의하자 남성은 "쏘리"라고 사과한 뒤 현장을 떠났다.
부츠카리를 이상한 사람 몇 명의 기행으로만 넘기기도 어렵다. 일본의 한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 2만 1000명 가운데 부츠카리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한 비율이 14%, 목격 경험이 있다고 답한 비율이 6%로 나타났다. 경험과 목격을 모두 했다고 답한 비율도 5%였다.
고의성을 쉽게 입증할 수 없다는 게 부츠카리의 애매함이다. 맞은 사람은 방금 그 접촉이 이상했다는 걸 알지만, 말로 증명하려는 순간 곤란해진다. "일부러 그런 거죠?"라고 말했을 때 "아닌데요, 길이 좁아서요"라는 답이 돌아오면 끝이다.
피해자에게는 찝찝함만 남는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고, 불쾌함은 있는데 사건은 없다. 항의하면 예민한 사람이 되고, 참으면 모욕감이 남는다.
부츠카리가 음습한 이유다. 폭력과 실수 사이에 숨어 메시지를 보낸다. "네가 비켜", "네가 작아져", "내가 지나간다"…하지만 그 메시지는 기록되지 않는다. 욕설도 폭행 장면도 없고, 가해자는 이미 사람들 사이로 사라진 뒤다.
▲ 분노는 늘 정확한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해자는 왜 이런 행동을 할까.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건 분노의 전이다. 사람은 늘 분노의 원인에 정확히 분노하지 못한다. 직장에서 무시당했지만 상사에게 대들 수 없고, 가정에서 인정받지 못했지만 관계를 바꾸기 어렵다. 사회적으로 뒤처졌다고 느끼지만 그 구조와 싸울 힘은 없다. 그러면 분노는 엉뚱한 곳으로 흐른다.
이를 전위적 공격 행동(Displaced Aggression)이라고 부른다. 화를 나게 한 대상에게 직접 반응하지 못하고, 그 화풀이를 다른 대상에게 돌리는 방식이다.
좌절이 곧 공격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말로 정리하거나, 운동이나 일로 흘려보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신보다 안전해 보이는 대상에게 넘긴다.
가해자는 분노나 좌절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일 수 있다. 늘 밀려난다고 느끼는 사람, 자신만 양보한다고 믿는 사람, 사회 안에서 자신이 작아졌다고 느끼는 사람, 자기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크게 울리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
실제로 그가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 타인이 정말 그를 무시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그가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세상이 자신을 밀어냈다고 느껴서 자신도 누군가를 밀어낸다. 이때 가해자는 자신을 악인으로 상상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 폭력을 작게 만드는 문장들
가해자의 머릿속에는 이런 문장들이 떠오를 수 있다.
'나만 비킬 필요는 없잖아.'
'저 사람도 앞을 봤어야지.'
'길에서 스마트폰을 보니까 그렇지.'
폭력을 실수로 바꾸는 표현들이다. 부츠카리의 핵심에는 이 언어의 세탁이 있다. 주먹으로 때리지도, 욕을 하지도, 시비를 걸지도 않았다. 그러니 자신의 행동을 작게 만들 수 있다. 이 '작게 만들기'가 가해자에게는 도피로 작용하고, 피해자에게는 2차 불쾌감으로 남는다.
▲ 군중은 가해자에게 알리바이를 준다
부츠카리는 도시형 폭력이다. 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가고, 아무도 오래 보지 않는다. 이 환경이 가해자에게 알리바이를 준다. 군중 속에서는 책임감이 흩어진다.
탈개인화 이론은 군중과 익명성이 개인의 자기 인식과 책임감을 낮추고,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동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고 설명한다.
책임이 흐려지는 공간에서 비겁한 사람은 잠깐 용감해진다. 정확히는 들키지 않을 것 같아진다. 이런 유형의 공격은 정면 대결을 피한다. 말싸움, 신고, 공개적 충돌처럼 책임이 남는 상황보다, 스치고 사라지는 방식을 택한다. 들키지 않을 것 같아서 한 행동이 발각되는 순간, 가해자의 알리바이는 무너진다.
"쏘리, 쏘리."
육은영의 영상에서 많은 사람이 통쾌함을 느낀 장면이다. 짧은 사과에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실수였다는 주장, 더 커지지 않았으면 하는 계산, 자리를 벗어나려는 본능. 당당한 사람의 사과가 아니라, 걸린 사람의 퇴장이다.
▲ 약자 앞에서만 커지는 어깨
부츠카리에서 특히 중요한 건 표적 선택이다. 아무에게나 부딪치는 게 아니다. 피해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대상은 여성, 아이, 체구가 작은 사람,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 혼자 있는 사람, 무방비 상태인 사람이다.
가해자는 본능적으로 계산한다. 반격할 것 같은 사람에게는 덜 간다. 몸집 큰 남성, 무리 지은 사람들, 자신에게 즉시 맞설 수 있는 사람에게는 조심한다. 그러다 만만해 보이는 사람 앞에서만 어깨가 넓어진다. 그래서 이 행동은 더 비겁하다. 분노가 커서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약해 보여서 부딪치는 것이다.
그는 누군가를 세게 때리지 않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기 안의 응어리를 낯선 사람에게 넘겼다. 상대는 그의 사정이나 상처를 모른다. 그의 하루가 얼마나 나빴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몸으로 그 감정을 받는다.
이건 약자의 방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약자를 향한 폭력이다. 상처받은 사람이 언제나 선한 것도, 억울한 사람이 언제나 정당한 것도 아니다. 억울함을 핑계로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만드는 일이 부츠카리다.
▲ 모욕감은 낯선 사람에게도 방향을 찾는다
가해자의 마음에서 중요한 감정은 모욕감일 수 있다. '나는 무시당했다', '나는 늘 밀렸다', '사람들은 나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쌓이면, 길 위의 낯선 사람은 자신을 계속 밀어냈다고 믿어온 세계의 대리인이 된다.
현대 일본 사회의 스트레스, 젠더 역학, 낡은 남성성의 흔들림은 부츠카리 현상의 배경으로 꼽힌다. 어쩌면 가해자는 오래전부터 자신이 작아졌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연애에서, 사회에서,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고 느꼈을 수 있다.
이런 사람도 길에서는 잠깐 강자가 될 수 있다. 어깨를 세우고 직진하면 사람들이 비키고, 누군가는 휘청이거나 놀란다. 아주 짧은 순간, 그는 자신이 공간을 장악했다고 느낀다. 초라한 권력이다.
관계 안에서 영향력을 만들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은 몸으로 영향력을 확인하려 한다. 밀고, 치고, 지나가고, 모른 척한다. 부츠카리는 몸으로 하는 '작은 지배'다. 말로 설득할 수 없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 몸의 충격으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 폭력이 응징으로 세탁되는 순간
가해자에게는 나름의 명분이 있다. 물론 타당하진 않지만, 자신을 설득하기엔 충분하다.
길이 좁은데 상대가 나를 의식하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앞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먼저 비키지 않았다. 내 동선을 방해했다. 그러니 부딪치는 게 맞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폭력은 응징으로 바뀐다. 가해자는 자신이 먼저 선을 넘었다고 느끼지 않는다. 상대가 먼저 예의를 어겼다고 느낀다. 좁은 길에서 나를 배려하지 않은 사람, 자기 세계에 빠져 주변을 보지 않은 사람, 내가 비켜줄 것이라고 당연하게 여긴 사람. 상대를 이렇게 규정하면 어깨로 밀고 지나가는 행동도 공격이 아니라 '버릇을 고쳐주는 일'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렇게 폭력을 저지르면서도 자기 안에서는 질서를 바로잡는 사람처럼 느낄 수 있다. 실제로는 낯선 사람에게 분노를 떠넘긴 것뿐인데, 마음속에서는 '무례한 사람에게 한 방 먹인 것'처럼 포장된다. 폭력은 이렇게 정의감의 얼굴을 빌린다.
특히 자기 삶이 계속 손해였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그렇다. 오늘 길 위에서 만난 낯선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을 무시했다고 믿어온 세상 전체를 본다. 그리고 그 세상에 어깨로 항의한다.
하지만 그 항의는 비겁하다. 정당한 문제 제기도, 공개적인 대화도 아니다. 상대가 정말 잘못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는다. 항의받을 틈도 남기지 않은 채, 그저 부딪치고 사라진다.
응징이 아니라 응징의 흉내다. 세상에 항의할 용기는 없고, 낯선 사람을 밀칠 비겁함만 남은 몸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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