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 비글로 감독의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정체불명의 핵탄두 미사일 한 발이 미국을 향해 날아오는 상황을 다룬다. 미국 정부와 군은 누가 발사했으며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18분 안에 판단해야 한다. 애니 제이콥슨의 <24분: 핵전쟁으로 인류가 종말하기까지>도 조선이 발사한 핵탄두가 미국에 도달하고 전면 핵전쟁으로 번지는 과정을 분 단위로 배열한다. 두 작품이 제시하는 세계에서 인류의 운명은 미국의 대통령과 군 지휘부가 제한된 시간 안에 내리는 판단에 달려 있다.
세계는 언제든 정체불명의 적이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극도로 위험한 장소로 제시되고, 미국은 그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판단 주체로 등장한다. 미국의 핵전략과 군사적 행동이 위기를 만들어온 과정은 사라지고, 다른 국가들은 미국의 결정을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가 된다. 이러한 공포의 구도가 반복될 때 사람들은 세계가 실제보다 더 잔혹하고 통제 불가능한 곳이라고 인식할 뿐 아니라, 미국의 보호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를 생존의 위협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외교와 안보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잔혹한 세계 증후군’이다.
‘잔혹한 세계 증후군’(Mean World Syndrome)은 대중매체에서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를 장기간 접한 사람들이 세상을 실제보다 훨씬 위험한 곳으로 인식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한국의 안보 담론에서는 북한의 핵무기, 중국의 팽창, 러시아의 위협이 매일 파국의 전조처럼 제시된다.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위험의 일부만이 반복적으로 확대되고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한미동맹과 미국의 확장억제가 제시된다는 것이 문제다.
한국의 ‘유사 외교행위’에도 이 구조는 적용될 수 있다. 과거 한국은 독자적 핵개발, 전작권 회수, 혹은 ‘균형자 외교’ 등을 통해 미국에 대한 비대칭적 의존성을 줄이려고 시도했지만, 북핵 고도화나 미·중 갈등과 같은 지정학적 위기가 올 때마다 독자적 해결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고 다시 미국의 핵우산으로 되돌아갔다. 이 반복 속에서 동맹은 선택지가 아니라 금단을 막는 약물처럼 기능하게 되었다. 방위비 분담금 압박, 미·중 갈등에 휘말릴 위험성,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서의 희생 등 구조적 비용을 알면서도, ‘동맹 약화는 국가 소멸’이라는 프레임에 길들여진 나머지 그 불안한 동맹 구조를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 하는 강박심리 상태로 이어진다.
여기서 다시 ‘잔혹한 세계 증후군’과의 융합이 이루어진다. 동맹 체제가 영속하기 위해서는 대중이 느끼는 현실의 위협은 언제나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거대해야 한다. 그래서 위협은 늘 과잉 생산되어야만 한다. 조중동과 숭미파 그리고 미국은 동북아의 지정학적 위기와 적대국의 위협을 매일같이 자극적이고 압도적인 방식으로 생산해내고 대중은 세상을 극도로 위험한 곳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공포는 집단적 무력감으로 이어지며, 결국 한미동맹이라는 안보 우산 아래 머무는 것 외의 다른 외교적 상상력을 마비시킨다.
이를 탈피하는 것이 ‘진짜’ 외교의 길이다. 국가의 안보 의존증이나 심리적 마비 상태를 벗어나는 과정은 개인의 중독 치료 과정과 같다. 갑자기 동맹을 끊어 생기는 ‘금단 증상’을 피하면서도, 스스로 서는 자생력을 회복하기 위한 단계적 전략이 필요하다. 첫째, 주어지는 공포를 당연한 현실로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저들이 조장하는 지정학적 위기나 공포의 언어가 객관적 사실인지, 아니면 특정 권력 구조나 한미동맹 의존론자들의 이익을 보위하기 위해 과잉 생산된 서사인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둘째, 상상력의 회복이요 이분법을 넘어선 전략적 사고다. 중독 상태의 무서운 점은 “동맹이 없으면 곧 소멸”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에 갇혀 다른 대안을 상상조차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외교의 선택지를 ‘친미냐 반미냐’, ‘동맹이냐 고립이냐’라는 단선적 프레임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 숭미적 양자 동맹에만 올인하기보다 중견국 연대, 다자주의 안보 협력체, 경제·안보적 다각화 등 네트워크형 외교 체질로 전환하여 의존의 밀도를 낮추어야 한다.
셋째, 독자적 주체화다. 갑작스러운 단절은 사회적 혼란을 부를 수 있으니 서서히 의존도를 줄여나가더라도, 독자적인 전략 기획 능력, 정보 자산의 독립, 국방 기술의 자립으로 실질적 능력을 누적해 나가야 한다. 동맹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일방적으로 굴종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상대에게 첨단 기술 공급망, 지정학적 요충지 등 필수적인 가치를 제공할 수 있음을 각인시켜 우리가 자동적으로 미국의 전략지도 안으로 흡수되는 것을 막는 협상력을 키워야 한다.
지난주 강경화 주미대사가 본부의 부름으로 일시 귀국했다. 7월 16일에는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 회의에도 참석했다. 주미대사 외에도 통상적인 참석자가 아닌 재정경제부, 산업통상부, 공정거래위 당국자도 참석했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강 대사가 현장에서 느끼는 미국의 대한국 압박을 본국에 전달해 정부가 이를 심각한 동맹의 위기로 받아들여 미국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방안, 즉 미국의 요구를 전부 수용하는 방책을 마련하자는 목적일 것이다. ‘재발성 해독 증후군’이 고개를 들고 있다. 예속 의식이다.
역사적으로 강대국이 설계한 안보 프레임이라는 중독 구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탈주 경로를 택한 국가들의 사례는 많다. 공통점은 강대국이 제공하는 안정망을 걷어차는 ‘금단 증상’의 고통과 마찰을 감수하면서도 스스로 주체화되는 길을 택했다는 점이다. 먼저 프랑스의 드골주의다. 샤를 드골 대통령이 1950-60년대에 추진한 정책은 강대국 의존증을 극복한 가장 정교한 외교적 해독 사례다. 드골이 결정적 질문을 던진다. “소련이 파리를 공격할 때, 미국이 과연 뉴욕을 포기하면서까지 프랑스를 위해 핵보복을 해줄 것인가?”
두 번째로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주의다. 요시프 티토는 소련의 무조건적인 복종 요구를 거부하면서도 반대편 극단인 미국 진영으로 편입되지 않았다. 티토의 해독 조치는 인도(네루), 이집트(나세르)와 손잡고 비동맹 운동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소련 앞에서 주권을 지켜냈고, 미국의 경제 원조는 받되 종속은 거부하며 독자적인 사회주의 모델을 유지했다.
세 번째는 스웨덴의 무장 중립(Armed Neutrality)이다. 냉전기 스웨덴은 바로 옆 소련이라는 거대한 위협 속에서도 ‘동맹 비가입을 통한 평시 중립, 전시 중립을 위한 강력한 국방’ 노선을 유지했다. GDP의 4%에 달하는 국방비를 투입해 독자적 방위산업을 키웠고, 동맹이라는 외부 약물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군사적 면역력을 키워 생존한 사례다.
동맹은 영원하지 않으며 스스로 책임지지 않는 안보는 허상이다. 의존을 줄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마찰을 감당해 내는 전략적 담대함이 주체화의 핵심 열쇠다. “미국은 파리를 위해 뉴욕을 희생할 수 있는가?”라는 드골의 질문은 오늘날 한반도에서 “미국은 서울을 위해 로스앤젤레스를 희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조선은 미 본토를 겨냥한 고체연료 ICBM과 다탄두 재진입 기술을 고도화했다. 미국이 한국에 핵보복을 제공하는 순간 미국 본토의 대도시가 북한의 핵보복을 받게 되는 구조다. 문제는 미국의 선의가 아니라 계산이며, 그 계산은 항상 미국의 생존을 우선한다. 18분이든 24분이든 핵미사일 요격은 성공하기 힘들다.
미국 본토가 인질로 잡힌 구조적 현실과, 한국 사회가 겪는 집단적 불안증이 결합하면서 일종의 심리적 마비 상태인 ‘확장억제 잔혹한 세계 증후군’이 발생한다. 한국 정부는 ‘워싱턴 선언’이나 핵협의그룹(NCG) 같은 미국의 ‘재확인’을 받아오지만 구조적 딜레마가 사라지지 않는 한 약효는 금방 떨어진다. 드골은 이 마비 상태를 깨뜨리기 위해 프랑스의 주체화를 선택했다. 드골은 동맹에 영혼을 의탁하지 말고 철저히 국익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관리하라고 조언한다. 티토도 그렇고 스웨덴도 그렇다. 결국 자주가 해답이다.
필자 소개
직업 외교관으로 일했다. 1985년에 외무부에 처음 들어간 이후 약 15년 이상을 해외에서 지냈다. 보스턴, 파리, 텔아비브, 하노이, 워싱턴, 비슈케크(키르기스스탄), 바르샤바, 루안다(앙골라)가 그의 활동 공간이었다. 1962년에 태어난 저자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에 곧바로 외무부에 입부했다. 자연히 외무부 내 경력도 경제외교 분야에 집중되었다. 코이카 창설, 우리나라의 OECD 가입, 한·미 FTA 협상 과정에 관여했다. 아울러 한·미 원자력협정을 협상했고, 보건복지부에서 국제협력 업무를 총괄했으며, 2014년부터 2년간 앙골라에서 대사로 일했다. 이후 2018년 6월 외무부를 퇴직하고 국제기구인 세계스마트시티기구(WeGO) 사무총장으로 행복도시를 창조하는 도시외교를 추진했다. 2021년 6월 말로 지난 36년간 공직을 모두 마친 저자는 지금은 이창천이라는 필명으로 시, 소설, 에세이, 칼럼, 인류문명 비평서 등을 쓰는 작가로서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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