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배라는 인물을 잘 소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나홍진 감독님을 만난 게 제 인생의 한 획을 그은 것 같다는 거였어요. 대중은 결과물만 보고 평가하시지만, 감독님이 정말 많은 디테일을 만들어주셨어요. 제 얼굴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잡아주시면서 캐릭터를 만들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나홍진 감독과의 작업은 캐스팅 오디션 단계부터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단순한 연기 테스트를 넘어 캐릭터의 본질을 파고드는 깊은 대화가 오갔던 시간이었다.
"감독님을 실제로 처음 뵀는데, 바로 오디션을 보지는 않았어요. 먼저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시고 양배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설명해주셨어요. 감독님이 '이 친구는 나쁘지도 착하지도 이상하지도 않은 친구다. 그런데 악의 악이다'라고 하셨어요. 또 제가 생각하는 나쁜 사람들은 양배에 비하면 하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사람들은 걸렸고 잡혔지만, 양배는 잡히지 않는다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 패닉이 왔어요. 단순히 극적으로 필요한 캐릭터가 아니라 정말 많이 고민해야 하는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제 나름대로 분석해서 연기를 했는데, 감독님이 피식 웃으시더라고요. 음문석으로 보면 그냥 웃고 계신 건데, 양배 입장에서는 내가 진중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나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 순간 오히려 더 연기에 집중이 됐어요. 이후에 매니저를 통해 같이 하자는 연락을 받았을 때 너무 행복했어요. 나홍진 감독님의 팬이었고 오랜만에 하시는 영화에 제가 대사 있는 인물로 나올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았어요."
앞서 나홍진 감독은 GV를 통해 양배를 두고 "너무 비호감이라고 생각했다. 일의 원흉이어도 인간적 매력이 느껴지지 않으면 재밌지 않을까 했는데, 연기를 너무 잘해서 비호감에 캐스팅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철저히 계산된 설정 속에서, 음문석 역시 감독과의 단단한 궁합 속에 디테일을 채워갔다.
"감독님이 생각하신 캐릭터에 디테일한 살을 붙이는 작업을 저도 같이 고민한 거예요. 나홍진 감독님은 너무 명확하세요. 순간적으로 '이게 좋겠다' 해서 선택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기본적인 틀이 있고 그 안의 디테일을 꽉 채우려고 하시는 분이에요. 저는 감독님이 만들어놓은 양배라는 틀 안에서 조금 빈 곳이 있으면 감독님과 이야기하면서 그 빈 곳을 채워갔다고 생각해요. 제가 감독님을 설득한 게 아니라 감독님이 만들어놓은 양배와 제가 생각한 디테일이 하나로 맞춰져서 캐릭터가 완성된 것 같아요. 그래도 현장 호흡은 정말 좋았어요. 내일 당장 감독님이 '레츠 고' 하면 바로 갈 수 있을 정도로 궁합이 잘 맞았어요. 리허설 전에는 정확하게 '여기서 이렇게, 이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해주세요. 그러면 저는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안에서 놀 수 있었어요."
구체적인 전사가 주어지지 않은 인물이기에 양배의 고유한 행동 양식은 철저한 관찰과 본능적인 영감에서 출발했다. 그가 찾아낸 해답은 다름 아닌 '아이의 순수한 본능'이었다.
"감독님이 양배가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왔는지까지 디테일하게 말씀해주신 건 아니었어요. 대신 양배의 특징적인 부분, 놓치면 안 되는 포인트들을 짚어주셨어요. '호프'는 누군가의 전사를 길게 끌고 가는 영화라기보다 하루 동안의 진행형으로 시작해서 진행형으로 끝나는 영화잖아요. 그래서 그 안에서 제가 찾아야 할 숙제가 있었어요. 감독님이 주신 디테일과 양배가 순간순간 상황에 대처하는 행동들을 통합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어느 영화에나 있을 법한 인물처럼 단순하게 접근하면 안 될 것 같았어요. 그러다 아는 누나의 조카가 무언가를 입에 넣으려다가 뺏기는 모습을 봤어요. 아이는 그 행위가 위험하거나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본능적으로 행동하더라고요. 그 모습이 캐릭터를 찾고 있던 저에게는 무섭게 느껴졌어요. '이거다. 아이로 가자'고 생각했어요. 양배의 집에 마네킹 같은 것들이 있어도, 양배에게는 그게 변태적인 게 아니라 그냥 놀이이자 장난감인 거예요. 그런 속을 알 수 없는 모습들이 오히려 영화 안에서 괴이하고 서스펜스로 다가온 것 같아요."
본래의 훈훈한 실물과 극 중 파격적인 비주얼의 괴리 덕분에 무대인사 현장에서는 유쾌한 해프닝도 끊이지 않는다.
"제일 많이 느끼는 건, 생각보다 저를 못 알아보시는 분들이 많다는 거예요. 감독님, 선배님들이 인사를 하고 제 차례가 오기 전에 분위기를 보면 '쟤는 뭔데 나온 거야?' 하는 느낌이 와요. 그래서 제가 '우리 집에 있다니까요'라는 대사를 하면, 아시는 분들이 박수를 치시고 옆 사람을 치면서 알려주시는 재미가 있어요. 나홍진 감독님, 선배님들 사이에 제가 껴 있는 것 자체가 너무 기분 좋고, 무대인사 때 반겨주시는 것도 너무 감사해요. 한 분 한 분 다 인사드리고 악수하고 안아드리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서 아쉬워요. 제 마음은 너무 감사해요."
독보적인 개성을 지닌 캐릭터들을 연이어 소화해 온 그는 인물을 나누어 바라보기보다는 모든 배역에 내재한 감정의 결에 집중한다.
"제가 특수 머리 전문 배우였다고 할 정도로 스타일링을 많이 했어요. 어떤 분들은 제가 악역을 많이 한다, 코미디를 많이 한다고 구분하시는데 저는 캐릭터를 처음 잡을 때 그렇게 나누지는 않아요. 살인자든, 연쇄살인범이든, 회사원이든, 변호사든, 평범한 사람이든 모든 캐릭터에게 희로애락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중에 제일 센 감정이 무엇이냐의 문제인 거죠. 얘는 나쁜 사람, 얘는 웃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네 가지 감정이 항상 녹아 있는 캐릭터를 만들려고 해요. 그중에서 '희'의 모습을 대중분들이 많이 좋아해주신 것 같아요. 그 '희' 안에도 제가 아직 하지 못한 수천 가지, 수만 가지 결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 보여드릴 게 많고, 그런 모습을 좋아해주시는 캐릭터를 더 많이 보여드리고 싶어요."
'호프'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양배' 캐릭터로 쏟아지는 찬사 속에서도 음문석은 오히려 스스로를 엄격하게 다잡으며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스스로) 너무 과대평가되고 있는 것 같아서 오히려 불안해요. 겸손하게 보이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저는 정말 제가 연기를 그렇게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친구들에게도 항상 '연기가 천천히, 늦게 들통났으면 좋겠다'고 말해요. 그래서 더 미친 듯이 연습하는 거고요. 칭찬을 많이 해주시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그저 중심을 지키려고해요."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주변의 시선에 대해서도 그는 뚜렷한 소신을 밝혔다.
"주변에서도 저를 좀 편하게 놔주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그런데 저는 제가 너무 못한다고 생각해요. 춤도, 노래도, 연기도 다 부족하다고 느껴요. 10번을 해도 아쉽고, 100번을 해도 아쉽고. 누군가는 완벽주의라고 하는데 저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요. 남들이 10번 할 때 저는 1000번을 해야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해놔야 저는 오히려 자유로워져요. 이건 성격인 것 같아요. 내려놓으면 못할 것 같아요. 노래를 부를 때는 진짜 가수여야 하고, 춤을 출 때는 진짜 댄서여야 하고, 연기를 할 때는 진짜 배우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완벽하게 하고 싶고 잘하고 싶어요. 다만 이제는 조금씩 내려놓으려고 해요. 한 번에 내려놓을 수는 없어서요."
인터뷰의 말미 그는 관객들을 향해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온전한 경험의 가치를 거듭 당부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직 '호프'를 안 보신 분들은 꼭 영화관에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영화관에서 내려가면 다시 영화관에서 볼 수 없잖아요. TV로 보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요. 이 영화의 사운드, 스케일, 디테일, 질감을 영화관에서 온전히 봐주시면 너무 감사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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