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송천의 디지털 산책] 철벽수비의 역설 …메모리 지키다 SW 미래 내줄라

문송천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
[문송천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

 
위대한 승리는 상대가 실수하여 무너지기만을 요행으로 바라는 비겁한 수비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 흐름을 꿰뚫어 보고 보이지 않는 공간의 빈틈을 먼저 선점하는 전향적이고 진취적인 용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손자병법 허실편에 나오는 攻其無備 出其不意(공기무비출기불의), 즉 적이 대비하지 않은 곳을 공격하고 적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 나타나라는 뜻이다. 변화의 흐름을 읽고 새로운 기회를 선점하라는 말과 같다. 축구 경기에서도 단 한 골의 리드를 지키기 위해 모든 선수를 골문 앞에 촘촘히 쌓아 올리는 극단적인 수비 전술은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2026년 월드컵 준결승전(4강전)에서 영국 축구가 보여준 전술은 한마디로 수비 위주 요행을 바라는 안일한 태도가 어떤 비극적 결말을 초래하는지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후반 초반 선제골을 터뜨리며 기세를 올렸던 영국은 감독 지시로 핵심 공격수를 성급하게 빼고 수비벽을 늘렸으나 경기장의 소유권을 상대에게 넘겨준 상황에서 1대 0이라는 눈앞의 스코어를 지키는 데만 급급했다. 이는 경기를 지배하는 메시라는 불세출의 천재에게 패스할 공간과 전술을 설계할 시간을 넉넉하게 내어주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경기 종료 불과 3분을 남긴 상태에서 1대 2 역전패라는 참혹한 대가로 돌아왔다. 방어적 태도가 자초한 이 역전패는 오늘날 한국 정보기술(IT) 산업이 마주한 거대한 위기 국면과 소름 돋을 정도로 닮아 있다.

글로벌 기술 전쟁의 중심축이 하드웨어 제조에서 무형의 인공지능(AI)과 역시 무형의 소프트웨어 생태계로 완벽하게 재편되는 문명사적 격변기 속에서 한국 IT 산업은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라는 단 하나의 영화에 집착하며 지극히 방어적이고 관행적인 태도를 고수해 오고 있다. 가트너의 시장 분석에 따르면 2024년 한국의 소프트웨어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수십년째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며 이제는 단 1.2%라는 초라한 수치에 머물러 있다. 그 대부분이 아래 한글 덕이라는 기가 막힌 사실을 안다면 더욱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자부해 온 IT 강국이라는 호칭이 얼마나 허망한 모래성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원천기술과 인프라를 아우르는 자생적 토양이 자라나지 못한 탓에 AI 성숙도 평가(글로벌보스턴컨설팅그룹 발표)에서조차 한국은 상위권밖 제2군으로 밀려나는 수치를 당했다. 25% 내에 겨우 턱을 걸었을 뿐이다. 하드웨어라는 가시적인 껍데기 뒤에 숨어 원천 기술 개발을 기피하는 사이에 글로벌 시장의 지배력은 무형의 지적 자산이자 미래 플랫폼을 장악한 소프트웨어 강국들 쪽으로 완전히 이동해 버렸다.

우리가 이처럼 과거의 성공 공식에 취해 메모리 반도체라는 낡은 방어막을 보수하는 동안 경쟁국인 중국은 뼈를 깎는 체질 개선을 통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아우르는 완벽한 독자 생태계를 구축했다. 중국은 일찍이 2014년부터 제조업 중심에서 소프트웨어 중심 국가로의 전환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 결과 화웨이는 독자 운영체계(OS)인 하모니와 AP·AI 반도체를 국산 기술로 결합해 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여기에 더해 자국 거대 플랫폼 기업의 전폭적인 학습 인프라와 칭화대 출신 최고 인재가 결합하여 세계적 수준의 AI 서비스인 딥시크를 내놓았다. 중국이 기초가 되는 OS와 데이터베이스엔진(DB) 등 뿌리 깊은 하부 기술 생태계를 자체 조성해 놓은 것이다. 그 덕에 중국은 AI 성숙도 평가에서 미국 영국과 더불어 당당 제1군에 속해 있다.

우리가 소프트웨어를 필두로 하는 두뇌산업에 도전하지 못하는 관행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오랜 세월 지병처럼 이어져 온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이번에도 국가 7대 씨앗이란 이름으로 미래성장동력산업이 어김없이 지정됐으나 소프트웨어란 단어는 전혀 찾아볼 길 없고 전부 예외 없이 오로지 바이오 양자 에너지 소부장 공급망 등 하드웨어 일변도에 그쳤다. 정권이 수없이 바뀔 동안 소프트웨어는 보이지 않았고 이번에도 여전히 그랬다. 7개 모두 제조업에 해당하는 것이라 제조에 능한 우리로서는 그럴싸하게 잡혔다고 볼 수도 있으나 소프트웨어가 사실상 제조업의 극치로서 두뇌산업형 제조업이라는 점을 깨닫는다면 이는 유감 중의 대유감이다. 

지난 20년간 재계 시가총액 순위를 보면 10대 기업 내에 무려 9개가 변함없이 마이크로소프트를 위시한 순수 소프트웨어 전문 기업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왜 거기에 도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따로 필요 없으리라 본다. 소프트웨어란 정체가 과연 뮈길래 우리가 영 못하는 것일까. 소프트웨어는 100% 코딩이다. 요새는 코딩도 AI가 많이 도와준다고는 하나 그게 잘 안되는 분야가 소프트웨어다. 코딩은 순전히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소재 부품 장비 같이 실물로 보여주기는 곤란한 것이다. 설령 보여준다고 해도 그걸 원 제작자가 아닌 남이 이해하는 건 불가능이다.

이렇듯 소프트웨어 근본에 대한 깊은 불신과 경직성이 한국을 지배하게 된 역사는 길다. 최근 한국을 떠나 스위스 소재 인공지능연구소 교수로 자리를 옮긴 한 AI 학자의 고백은 한국 IT 산업이 직면한 인재 및 인프라의 잔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교육과 산업 현장은 근본 이론을 탐구하기보다 당장 프로그램에 기능을 덧붙여보는 얄팍한 응용에만 관심이 있다는 지적이다. 인사도 학벌 선호에 머물러 고급 기술자를 선별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그러니 국내 최고 엘리트라는 인재들조차 새로운 기술을 스스로 창조해 내는 역량 면에서 글로벌 중위권과 비교해도 격차가 크다. A급 소프트웨어 인재들을 모아놓았던 기업들도 단발성 흥행에만 의존했고 지속 가능 생태계를 만드는 데 실패했던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이러다보니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의 글로벌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저단가 외주 개발 시장은 베트남 폴란드 발칸반도 등이 이미 휩쓸고 있으며 가격이나 인력 역량 측면에서 인도라는 나라 수준을 넘어서는 것조차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고단가 플랫폼 시장으로 눈을 돌려봐도 상황은 역시 절망적이다. 게임 산업의 주도권이 중국에 이미 넘어간 상태고 세계 최대 시장인 영어권 문화·및 언어 장벽을 극복할 토대 부족으로 인해 커뮤니티 기반 빅테크 기업을 탄생시키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이상은 그가 본 견해다.

그의 견해에 덧붙인다면 인력 구조에서도 문제가 많다. A급 인재들이 소프트웨어 시장으로 유입될 유인조차 제공하지 못하는 구조 속에서 무슨 AI 3대 강국 구호 같은 거대 구상은 사실상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국내 산업 생태계 전반에 깊게 뿌리내린 극단적인 관성에너지와 위험 회피주의다. 기업의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고위직은 도전을 거부하는 고인물이 되어버렸고 한창 일할 청년들은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에만 몰두한다. 결국 혁신을 가로막는 경직성이 수십년간 쌓아 올린 국가의 산업 주도권을 타국에 그대로 순순히 넘겨주는 방향으로 가는 비극적인 결말을 자초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미래 기술 경쟁력을 짊어질 최고급 인재들의 이탈을 불러일으켜 영구적인 인재 빈곤이라는 파국적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OECD 조사에서 세계 최고 수준 엘리트 AI 연구자 중 거의 절반이 중국 출신인 반면 한국은 국내 인재들이 고국을 등지고 해외로 탈출하는 대표적 인재 유출국으로 분류된다. 이렇듯 단기 하드웨어 프로젝트에 집중하며 위험을 회피하는 정부 및 기업 투자 환경 속에서 젊은 연구자가 원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싶어도 딥시크 같은 혁신을 믿고 과감하게 밀어줄 투자자나 사회적 인프라도 부족하다. 스위스로 떠난 교수의 말처럼 한국에서 날개가 꺾인 채 살아가던 A급 인재들은 이제 한국 대학이나 기업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고 유럽과 미국 등 해외로 탈출하여 날개를 펼치는 길을 선택하고 있다. 우수 소장 인재는 미국과 유럽으로, 우수 노장 퇴직 인재는 중국으로 떠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 오늘의 한국 현주소다.

그럼에도 한국은 진취적인 모험 대신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처분만을 갈구하는 소프트웨어 패배주의에 깊이 빠져 있다. 독자적인 소프트웨어 엔진을 빌드하겠다는 담대한 기업가 정신은 자취를 감추었고 오로지 엔비디아나 오픈AI 같은 미국 빅테크와 협력 관계를 맺었다는 홍보성 기사에 주식 시장이 요동을 거듭하는 기형적 풍경이 일상이 되었다. 국가 재정 또한 독자 기술 생태계 자생적 구축보다는 엔비디아 GPU를 수입해 오는 데 상당 부분 소비되며 실질적인 기술 종속을 심화시키고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머리(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생각 없이 남이 만든 머리를 돈 주고 사다 쓰기만 하는 수구적 방어 전술로는 반도체 제조업 시장마저 중국에게 넘겨주고 글로벌 시장의 낙오자로 주저앉게 될 가능성이 크다.

영국 축구팀 주장 선수는 패배 후 "우리가 너무 일찍 내려앉은 게 패인"이라며 감독의 수비적 전술을  강하게 비판했다. 한 골의 리드에 취해 후반 30분 남긴 상황에서 수비 카드를 너무 일찍 꺼냈다가 메시라는 천재의 기습적 파상공세에 무너진 영국 축구의 비극은 오늘날 한국 IT 산업과 정부에 엄중한 경고를 던져 주고 있다. 한국 IT 역시 메모리 반도체라는 착시와 과거의 성공에 자족한 채 안주하다간 영국 축구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대학교 강단과 기업 현장에서 인재가 모이고 수익을 내는 선순환이 깨진 지금 국가 IT 생태계 전반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위한 소프트웨어 대전환 수술에 당장 착수해야 한다. 단순 응용 기술이나 외산 장비 확보라는 단기 성과 지표에서 벗어나 기초 수학 및 원천 소프트웨어(OS, DB) 기술을 착실히 다지는 장기적 연구 개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영국의 패배는 전적으로 전략을 잘못 짠 감독의 책임이었다. 한국에게 주어진 소프트웨어의 골든타임은 결코 많지 않다. 우리 정부와 산업계가 메시 같은 지혜롭고 담대한 해결사가 되어 소프트웨어라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도체라는 단 하나의 가시적 성과를 지키는 데 급급한 나머지 미래 산업의 주도권을 모두 내주고, 결국 역사에 뼈아픈 패배자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문송천 필자 이력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 샴페인) 전산학 박사 ▷유럽IT학회 아시아 대표이사 ▷대한적십자사 친선홍보대사 ▷카이스트·케임브리지대·에든버러대 전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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