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한국석유공사와 한국가스공사를 통합하는 공공기관 기능개혁 방향을 내놓으면서 가칭 '에너지자원공사'의 본사 위치를 둘러싼 울산과 대구의 경쟁이 시작됐다. 울산은 60년 넘게 축적해 온 정유·석유화학 산업과 울산항, 국가 비축·저장시설에 더해 수소·암모니아·해상풍력으로 확장되는 에너지 산업 생태계를 경쟁력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에 본보는 두 차례에 걸쳐 울산이 대한민국 에너지 산업에서 맡아온 역할을 돌아보고, 에너지 전환 시대 국가 에너지 거점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한 가능성과 과제를 짚어본다. <편집자주>
1962년 2월 울산 남구 매암동에서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이 열렸다.
정부가 같은 해 1월 27일 울산을 대한민국 최초의 특정공업지구로 지정한 데 이은 것으로, 석유정제와 석유화학, 자동차·조선 등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한 국가 산업화 전략이 울산에서 본격적으로 출발했다.
그 중심에는 에너지가 있었다.
원유를 들여와 정제하고 여기에서 생산된 원료를 다시 석유화학제품으로 만드는 산업이 성장했고, 원료와 제품을 실어나르는 울산항도 산업단지와 함께 규모를 키웠다.
64년이 지난 지금 울산은 다시 에너지를 앞세워 국가 산업정책의 중심에 서겠다는 구상을 내놓고 있다.
정부가 한국석유공사와 한국가스공사를 통합해 가칭 '에너지자원공사'를 설립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본사를 울산에 유치하겠다는 것이다.
김상욱 울산시장은 7일 담화문을 통해 "공공기관 통합과 이전은 지역 간 나눠먹기가 아니라 기능과 효율, 국가 전체의 이익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에너지 관련 공기업과 연구개발 기능을 울산에 집적해 '동북아 에너지 허브'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울산시가 제시하는 유치 논리의 출발점도 여기에 있다. 새로운 산업기반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60여년 동안 정유·석유화학 산업과 항만, 국가 비축시설, 상업용 저장시설 등이 축적된 지역에 국가 에너지 기능을 더해 집적 효과를 높이자는 것이다.
울산 에너지 산업의 역사는 대한민국 산업화 과정과 궤적을 같이한다.
울산시는 1962년 1월 27일 울산특정공업지구가 결정·고시된 것을 우리나라 최초의 산업단지 출발점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부터 석유정제와 석유화학, 자동차와 조선공업을 연계한 대규모 산업단지 조성이 계획됐다.
이후 울산에는 정유시설과 석유화학 공장이 잇따라 자리 잡았고, 원유를 정제해 석유제품을 생산한 뒤 나프타 등을 다시 석유화학 원료로 활용하는 산업생태계가 형성됐다.
1974년 4월 1일에는 울주군 온산읍 일원이 온산산업기지개발구역으로 지정됐다. 정유와 유류비축, 비철금속, 화학 등 중화학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또 하나의 국가산업 거점이었다.
현재 울산미포·온산국가산업단지를 중심으로 SK에너지와 S-OIL, 대한유화, SK가스, 롯데케미칼, 롯데정밀화학 등 대규모 정유·석유화학 기업들이 생산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울산의 에너지 경쟁력이 개별 기업이나 하나의 산업시설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60년 넘게 진행된 국가 산업정책과 민간투자가 축적된 결과라는 의미다.
울산의 에너지 산업이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대규모 생산시설과 항만, 저장시설이 동일한 산업권 안에서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원유와 각종 에너지 원료를 선박으로 들여와 정유·석유화학 공장에 공급하고, 생산된 석유제품과 화학제품을 다시 울산항을 통해 국내외로 반출하는 구조가 오랜 기간 형성돼 왔다.
울산항의 액체화물 관련 시설은 현재 35개 부두와 부이 5기, 67개 선석에 이른다. 본항과 온산항, 울산신항을 중심으로 원유와 석유제품, 액체화학제품 등을 대규모로 처리할 수 있는 항만기반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항만 조건은 울산의 동북아 에너지허브 사업에서도 중요한 자산으로 평가된다.
박현규 코리아에너지터미널 대표는 울산 에너지허브의 경쟁력을 설명하면서 대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항만 조건과 대규모 석유화학단지를 배후에 두고 있다는 점, 기존 석유비축시설과 저장 인프라 등을 울산의 강점으로 꼽았다.
에너지 생산시설과 대규모 소비처, 항만과 저장시설이 서로 가까운 곳에 있어 물류와 산업의 연계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울산의 역할은 에너지를 생산하고 수출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국가 에너지 안보를 위한 석유비축 기능이 더해졌고 이후에는 동북아 시장의 에너지를 저장하고 유통하는 상업적 거점으로 기능이 확대됐다.
한국석유공사가 운영하는 울산 석유비축기지는 1981년부터 운영됐으며 현재 저장용량은 1680만 배럴이다. 한국석유공사는 전국 9개 비축기지에서 모두 1억4600만 배럴 규모의 저장능력을 확보하고 있다.
또 하나의 축은 동북아 에너지허브 사업이다.
정부는 2008년 2월 '동북아 오일허브사업'을 국정과제로 선정했고, 울산 북항에는 한국석유공사와 SK가스가 참여하는 코리아에너지터미널(KET)이 들어섰다.
KET는 총 575만 배럴의 저장능력을 갖추고 있다. 석유제품 저장시설은 12기, 170만 배럴 규모이며 LNG 저장시설은 3기, 405만 배럴 규모다.
석유제품 터미널은 2024년 3월, LNG 터미널은 같은 해 11월 각각 상업운영을 시작했다.
석유에 머물렀던 오일허브 구상이 LNG와 향후 저탄소 에너지까지 포괄하는 에너지 물류거점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2014년은 울산 에너지 산업의 또 다른 전환점이었다.
정부의 공공기관 지방이전 정책에 따라 한국석유공사가 경기 안양 평촌에서 울산 우정혁신도시로 본사를 옮겼다. 같은 해 12월에는 에너지정책 전문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에너지경제연구원도 울산으로 이전했다. 한국에너지공단 역시 2019년 2월 경기 용인에서 울산으로 본사를 옮겼다.
기존 정유·석유화학 산업과 항만·저장시설에 공기업과 연구·정책 기능이 더해진 것이다.
울산시는 현재 추진되는 공공기관 2차 이전에서도 에너지 분야 기관 유치를 주요 전략으로 삼고 있다.
지난 9월 1일 출범한 울산시 공공기관 2차 이전 유치위원회 역시 에너지·발전공기업 통합본사와 에너지 관련 기관 등을 주요 유치 대상으로 설정했다. 앞서 울산시는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과 한국석유관리원 등을 포함한 이전 희망기관을 검토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지난 3일 한국석유공사와 한국가스공사의 통합 방침을 내놓으면서 울산의 에너지 공공기관 집적 전략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한국석유공사가 울산에 있는 반면 한국가스공사는 대구에 본사를 두고 있어 두 지역 모두 통합공사 유치에 나선 상태다.
대구시는 가스공사가 전국 5346㎞의 천연가스 주배관과 445개 공급관리소를 실시간으로 통제하는 중앙통제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과 조직·자산·매출 규모 등을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기존 국가 가스 공급망 컨트롤타워를 중심으로 석유기능을 결합하는 것이 조직 안정성과 비용 측면에서 효율적이라는 논리다.
반면 울산은 공기업의 현재 규모보다는 통합 이후 수행해야 할 기능을 어디에서 산업과 가장 효율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지를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상욱 시장은 7일 담화문 발표 후 기자회견 질의응답에서 단순히 석유공사의 재무상황을 이유로 가스공사 중심으로 통합하는 방식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말하면서 "대한민국 전체를 기준으로 생각해 달라", "울산이 잘할 수 있는 것을 도와줘야 대한민국에도 도움이 되는 것 아니냐"고 거듭 강조했다.
울산이 에너지자원공사 유치의 근거로 내세우는 핵심은 집적효과다.
정유·석유화학 기업과 대규모 액체화물 항만이 있고, 국가 석유비축기지와 상업용 에너지터미널이 있으며, 한국석유공사와 에너지경제연구원, 한국에너지공단 등 에너지 관련 공공기관과 연구기능도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산업기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통합공사의 입지를 결정할 수는 없다.
가스공사가 가진 전국 공급망 관리기능과 조직 안정성, 통합비용과 직원 정주여건 등도 함께 비교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울산이 유치 논리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기존 산업과 항만·저장시설, 공공기관의 집적이 실제 물류비 절감과 공급망 안정, 연구개발 강화로 얼마나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1962년 석유에서 시작된 울산의 에너지 산업은 64년 동안 정유·석유화학, 항만, 비축과 저장, 공기업과 연구기관으로 영역을 넓혀왔다.
에너지자원공사 유치전은 이러한 축적된 기반이 앞으로의 국가 에너지 정책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지를 확인하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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