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시리즈 13] 호암의 단감론... 시련도 소중한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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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02-19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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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이병철은 ‘좌절을 겪어야 큰 그릇이 된다’고 말하곤 했다. 평생 사업을 하면서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던 호암은 ‘일이 잘 되어나갈 때는 오히려 다가올 불행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체득했던 것이다. 

“떫은 감도 정성스레 잘만 말리면 단감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급히 서두르거나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감은 달게 되지 않는다. 이렇게 떫은 감을 달게 만들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업가에게는 항상 지난날에 겪은 일들을 돌이켜보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런 마음가짐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경험을 쌓는다 하더라도 살이 되고 피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가 강조했던 ‘단감론’이다. 기쁨 뒤에 반드시 슬픔이 따르는 경우를 많이 겪어봤던 터라 항상 다음에 닥칠 불행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지난 불행을 잊지 않고 거울 삼는 것이 오늘의 행복에 도취되는 것보다 몇 배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호암이 반드시 이루고 싶어 했던 사업이 전자, 모직, 제당, 비료산업이었다. 그러나 이 중 비료산업은 그에게 있어 난공불락 요새와 같았다. 호암의 비료산업이야말로 그의 꿈과 좌절을 농축해 담고 있다. 꼭 성취해 보고 싶었지만 번번이 좌절되는 아픔을 겪으면서 경영자로서 그의 역량은 더욱 성숙돼갔던 것이다.

호암은 오랫동안 비료공장 건설을 꿈꿔오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의 성공에 힘입어 본격적인 구상에 돌입하게 된다. 그는 수출경쟁력을 갖춘 비료공장을 세우고 싶어 했다. 최신식 30만~35만톤 규모의, 그것도 동양 최대의 비료공장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금을 동원할 길이 막막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에서 축적한 자금에다 국내 은행 대출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떤 일이든 간절히 꿈꾸면 이뤄진다고 했던가. 결정적 계기는 참으로 우연히 찾아왔다. 
1959년 도쿄의 제국호텔에 머물던 이병철은 TV의 신년대담에서 미국과 영국, 서독, 캐나다, 호주 등 선진 10개국의 발의로 개발 가능성이 있는 후진국에 장기 저리로 차관을 제공한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이기붕 국회의장을 만나 외국차관으로 대규모 비료공장을 세우겠다는 구상을 말했다. 다음날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갔다.

호암은 “장치 우리나라가 비료를 자급자족하려면 소규모 공장으로는 불가능하다”며 “ 4,000~5,000달러를 투자하는 국제적 수준의 현대적 대규모 공장을 여러개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4~5,000달러라면 당시 우리 정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자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대통령은 ‘유럽에서 차관을 도입할 수 있다’는 호암의 설명을 듣고, 안도하며 “훌륭한 생각이니 꼭 성취시키라”고 격려해줬다.

1960년 2월 이병철은 유럽 순방길에 올라 서독 크루프사의 자금지원과 이탈리아 몬테카티니 비료회사의 기술이전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깜짝 놀랄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에서 4․19혁명이 발발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는 뉴스였다.  

서둘러 귀국한 이병철은 부정축재자로 낙인찍혀 검찰 조사를 받게 됐다. 6개 계열사에 걸쳐 50억환 규모의 추징금을 선고받은 이병철은 그동안 추진해오던 비료 프로젝트 일체를 김영선 재무장관에게 맡겼다. 이어 1년여의 기나간 일본 외유에 나섰다.

1960년에는 5․16 쿠데타가 발발했다. 혁명 정부는 공장 건설을 통해 국가경제를 발전시키고 국민소득을 높인다는 계획 아래 외자 도입을 추진하게 된다. 각 기업인들은 하고 싶은 업종들을 선정해 미국과 일본, 유럽으로 외자유치 활동에 나서게 됐다.

이병철은 정재호(삼호), 김지태(조선견직)와 함께 울산 비료공동투자체를 결성해 일본과 유럽 방문에 나섰다. 일본의 후지전기, 고베제강, 신미쯔비시조선, 미국 비트로 인터내셔널, 서독 크루프 등이 투자의향서를 보내왔다.

이 가운데 고베제강의 조건이 가장 좋았다. 이병철은 외자 5,500만달러, 내자 50억환으로 연산 30만톤의 공장을 건설한다는 부푼 꿈에 벅찼다. 

하지만 기대도 잠시. 다각도로 비료공장 허가 여부를 검토하던 정부가 ‘삼성이 추진하는 공장 수준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규모’라며 비료공장 건설 포기 결정을 내린 것이다. 두 번째 좌절이었다.

다음해에 다시 기회가 왔다. 1963년 10월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정희가 ‘다시 한번 비료공장 건설을 추진해달라’고 권고해왔다.  

그러나 이병철은 이번에는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곧 허가해 줄 듯 하다가, 막상 외자도입 협상을 마치고 나면 불허하는 등 자주 바뀌는 정책을 도무지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혁명정권은 장기영 부총리를 통해 ‘이번에는 진정으로 밀어줄테니 걱정말고 공장을 추진해달라’고 종용했다.

우여곡절 끝에 1964년 8월 연산 33만톤 규모의 한국비료가 설립되고 공장을 착공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될 듯 보였다. 하지만 공장이 80% 가량 건설되고 있던 1966년 9월 이른 바 ‘한비 밀수사건’이 터졌다. 보세창고에 보관 중이던 OTSA(사카린의 원료) 약품이 불법으로 시중에 유출돼 판매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언론들은 삼성이 사카린을 밀수했다가 적발됐다고 대서특필했으며, 이후 나라 전체가 들끓었다. 수사 결과 미쓰이물산이 기계를 사주는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리베이트 100만달러를 삼성에 제시했는데 정상적으로 반입할 방법이 없어 불법적으로 처리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건의 전모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결과적으로 이병철은 10년간 정성을 쏟았던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다시 오랜 칩거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호암이 대부분 사업을 성공시켰지만 눈을 감을 때까지 통탄의 한(恨)으로 남았던 것이 바로 한국비료였다. 

이 ‘한의 기업’은 정부에 넘긴 지 27년, 호암 타계 5년 후인 1994년 삼성그룹으로 돌아가게 된다. 정부의 한국비료 민영화 방침에 따라 실시된 공개입찰에서 삼성이 2,300억원(내정가 1,300억원)으로 찾아간 것이다.

삼성은 한국비료를 인수한 뒤 법인명을 ‘삼성정밀화학’으로 변경하는 한편 사업영역을 비료사업에서 도료, 정밀, 전자 반도체 재료, 프리즘필름 등으로 확대했다.

삼성이 되찾았던 94년 당시 연매출액 1,665억원이던 삼성정밀화학(한국비료)은 2009년 현재 연매출액 1조원 규모(영업이익 900억원)로 기업으로 성장했다.

한국비료의 탄생과 헌납, 재인수 과정은 어떤 사업이든 기업과 기업인들이 강한 의지로 추진해나간다면 중도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극복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는 긍정적인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반증해주고 있다.   

아주경제= 특별취재팀 skyjk@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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