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지금의 범 현대그룹을 만든 데 가장 기여한 계열사는 어딜까. 우선 1950년 한국전쟁 때 물꼬를 트며 1965년 첫 해외 사업을 하게 해 준 현대건설을 빼 놓을 수 없다. 1970년대 초 아무런 경험도 없이 ‘배짱 하나로’ 영국에 차관을 빌려 시작한 현대중공업도 어느덧 세계 최대의 조선사로 컸다.
하지만 현재 가장 중요한 사업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현대자동차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다.
1976년, 최초의 국산 자동차 포니 생산라인 모습. (사진=정주영 박물관) |
현대그룹은 1966년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미국 포드자동차를 조립 판매한 것을 시작으로 1976년 최초 독자 모델인 ‘포니’, 1991년 최초 독자 엔진 ‘알파’ 개발 등 자동차 사업에서 연이은 성과를 냈다. 그 결과 현대자동차는 1990년대 들어 그룹 내 최대 계열사로 성장했다.
현대그룹이 분리된 현재도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은 17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매출규모 기준으로는 삼성그룹에 이어 국내 2위 그룹사다. 지난 2007년 이래 매출 100조원 시대를 맞기도 했다.
특히 지난 2009년에는 독일 폴크스바겐그룹, 일본 도요타, 미국 제네럴모터스,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에 이어 세계 5위로 올라섰다. 같은 해 현대기아차의 글로벌 판매 대수는 464만대. 지난해 전 세계 자동차 생산 대수의 7.8%다. 올해 목표는 이보다 15% 많은 540만대(현대차 346만대, 기아차 194만대)다.
정주영 회장은 지난 1991년 자서전을 통해 "머지 않아 한국의 자동차, 우리의 자동차 부품이 세계 시장을 휩쓰는 날이 반드시 온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는 현실이 됐다. 현재 현대기아차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Fortune)지는 올 초 현대차에 대해 “현대차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며 “속도 위반 딱지를 뗄 정도”라고 극찬했다.
◆포드와의 첫 만남… 그리고 결별= 1966년 4월 미국 포드자동차는 한국 진출을 위해 조사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자동차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던 정주영은 이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1967년, 포드 자동차 일행과 함께. 왼쪽 안이 정주영 회장이다. 현대자동차는 처음에 포드와 손잡고 자동차 생산에 나섰으나 후일 포드와 결별하고 독자 모델을 생산하게 된다. (사진=정주영 박물관)
동생인 정인영(전 한라그룹 명예회장)을 통해 만난 포드 측은 현대를 단순한 건설사로만 보고 접촉 대상자 명단에도 넣지 않았지만, 이듬해(1967년) 2월 ‘면접시험’을 거친 뒤 21(국산 부품)대 79(미국 부품)로 1차 자동차 조립 기술계약을 맺었다.
이처럼 빠른 계약 성사는 정주영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았다. 정주영이 세운 첫 회사는 자동차 수리 공장이었다. 비록 규모도 작고 기간도 짧았지만 정주영은 1940년 아도서비스,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운영했었다.
정주영은 포드 국제담당 부사장 앞에서 1만여 개에 달하는 자동차 부품 명칭을 청산유수와 같이 읊었고 면담은 두시간 만에 끝났다.
당시 한국에는 신진자동차공업사와 새나라자동차 두 곳에서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었다. 신진공업은 1966년 일본 도요타자동차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연간 3000여대를 생산하고 있었다. 새나라자동차도 일본 닛산자동차의 블루버드를 조립해 판매하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부품은 외국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늘 그랬듯 정주영은 시간을 오래 끌지 않았다. 울산자동차공장은 계약 1년 만인 1968년 첫 제품인 ‘코티나’를 생산, 곧바로 시판에 들어갔다. 당초 계약은 3년 내 생산이었다. 현대자동차는 곧이어 포드 20M, 포드 R-192 등 트럭과 버스 생산도 시작했다.
거기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현대자동차는 포드와의 계약이 끝나는 1971년 합자 비율을 50대 50으로 끌어올리려 했다. 또 자동차 자체 생산 능력과 직결되는 엔진 공장 설립도 추진했다. 하지만 포드는 엔진 기술을 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포드는 자금, 한국의 투자가치 등 이유를 들어 이를 거절했고, 현대차는 포드와 결별했다.
◆독자 모델 ‘포니’, 세계를 놀라게 하다= 현대자동차의 본격적인 모험은 이 때부터다. 국내 최초로 독자 모델 개발에 나선 것이다.
사실 정주영은 포드와 계약 때부터 부품 조립이 아닌 부품 국산화에 뜻을 두고 있었다. 조립만으로는 돈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동차 원가 중 부품 값은 70%였고 조립 비용은 9%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만족할 정주영이 아니었다.
정주영은 아우 정세영(전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에게 부품을 포함한 100% 국산자동차 개발을 지시한다. 참고로 정세영은 후일 정주영의 차남 정몽구가 경영권을 승계하는 1996년까지 현대자동차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자동차 부품 국산화는 국가를 위한 길이기도 했다. 당시 정부는 눈덩이 처럼 불어나는 자동차 부품 값으로 막대한 달러를 써야 했다. 1966년 당시 329만 달러였던 부품 수입 대금은 1967년 913만 달러, 1968년 2298만 달러, 1969년 4258만 달러로 3년 새 13배로 늘어났다.
현대가 하는 일이 늘 그렇듯 이 역시 안팎의 숱한 반대에 부딪힌다. 경쟁력을 갖춘 독자 모델 개발을 위한 5만대 규모의 생산 능력과 1억 달러의 막대한 투자 비용이 부담이었다. 당시 국내 승용차 총 생산 대수도 이제 겨우 2만대가 넘어선 시점이었다. 현대건설의 연간 공사액도 50억원(약 60만 달러)에 불과했다.
코엑스 자동차 전시장에 전시된 포니2와 정주영 회장 모습. (사진=정주영 박물관) |
하지만 정주영의 지시를 받은 정세영은 그 때부터 불굴의 투지로 국내 최초 독자 모델 ‘포니’의 개발에 착수한다.
1973년 9월 이탈리아 이탈디자인사에 100만 달러를 주고 디자인을 의뢰했다. 스타일링은 쥬지아로가, 엔지니어링은 만토바니가 맡았다. 쥬지아로는 폴크스바겐 골프, 파사트 이탈리아 알파로메오, 일본 이스즈 117 등을 개발하며 ‘제2의 미켈란젤로’로 불리던 당대 최고의 자동차 디자이너였다. 엔진 제작은 영국 조지 턴블과 계약했다.
이듬해인 1974년 7월에는 울산에 연산 5만6000대 규모의 승용차 공장 건설에 착수한다. 정주영은 당시 새나라자동차의 방해와 GMK(대우자동차의 전신)의 비웃음에 직면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하지만 그 해 10월 이탈리아 토리노 국제자동차박람회에서 이들의 비웃음은 싹 사라졌다. ‘포니’와 스포츠형 ‘포니 쿠페’가 뜻밖의 주목을 받은 것이다.
해외 선적을 기다리는 현대자동차. 미국 시장에 진출한 첫해 포니는 4개월만에 5만2천4백 대가 판매되는 기염을 토했다. 현재 현대자동차는 170여 개 국에 수출되고 있다. (사진=정주영 박물관) |
이후 포니는 1978년까지 단일 차종 국내 최초로 10만대를 돌파했다. 그 중 2만5000대는 수출이었다. 2년 후(1980년) 다시 누계 판매 20만대 마저 넘어섰다. 이 숫자는 그 해 서울 시내에 전체 차량(20만5000대)과 맞먹었다.
1982년 후소 모델인 포니2가 나왔다. 이 차량은 1985년 세계 자동차의 메카였던 미국 시장에 진출해 이듬해(1986년) 17만대의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곧이어 1987년 출시한 ‘엑셀’은 일본 소형차들을 제치고 미국 수입소형차 시장 판매 1위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그 해 엑셀은 전 세계적으로 26만대가 판매됐다.
(아주경제 김형욱·김병용·이정화 기자) nero@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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