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경의 트렌드브리핑] 음모론은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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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12-0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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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비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간질과 모략이 뒤섞인 음모론이 고등어에 소금 간 배인듯 스며있다. TV 드라마로 인기를 모아 웬만한 아줌마 할머니 세대가 다 알고 있는 중종 시절 '작서의 변' 스토리는 유명하다.
 
드라마 속에서 "뭬야!"하는 호통소리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경빈 박씨가 아들 복성군을 왕위에 올리려 했던 야심이 물거품되게 만든 사건이다.
 
김안로가 아들 김희를 사주하여 소동을 일으켜놓고 경빈에게 뒤집어 씌웠다. 당시 세자(인종)의 거처인 동궁 북쪽 후원의 나무 가지에 흉칙하게 만든 쥐의 사체를 매달아 놓아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은 것이다. 하필이면 돼지띠 세자를 상징하듯 돼지 형상으로 디자인 된데다가 세자의 생일날 일어난 소동이라 역모 사건으로 번졌다.
 
김안로 등은 경빈을 배후로 지목해 복성군까지 패키지로 묶어 폐위시킨 뒤 사약을 받게 만들었다. `여인천하`라는 드라마 시청자들은 대부분 경빈 박씨 역할을 맡은 탤런트 도지원의 절규와 발광 연기를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으며 눈시울을 붉힌다.
 
실제 역사에서는 훗날 김안로의 짓임이 밝혀져 신원이 회복되나 이미 세상은 바뀌어 문정왕후와 윤원형, 정난정의 천하가 되어 있다.
 
그 결과 인종, 명종 두 왕조가 이어지며 문정왕후가 권력의 실세로 한 시절 풍미하면서 왕권은 추락했고 권문세족이 발호했으며 민심은 떠났다. 친아들(명종)마저 어서 죽어주기를 원했다는 문정왕후 사후 30년이 채 안되어 임진왜란이 터졌고 역사는 이 여인이 활약한 세 왕조 동안을 권력을 둘러싼 가장 지저분한 암투의 시기로 기록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당대의 엘리트 권신 김안로가 적통 왕세자의 왕위승계를 지키기 위해 고을 무당도 번거롭다며 고개 저었을 법한, 그런 짓거리를 기획했으랴. 참으로 유치한 음모론이 왕실과 조정의 공론으로 횡행했구나 싶다.
 
영국 찰스 왕세자의 비였던 다이애나 공주의 교통사고 사망사건은 경빈의 죽음처럼 옛일도 아니라선지 아직도 음모론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 찰스 왕세자는 원래 지금은 부인인 카밀라 파커볼스와 연인이었는데, `평민출신을 왕비로 들일수 없다`는 여왕의 반대로 헤어졌다.카밀라는 찰스가 군복무를 하는 사이 다른 사람과 결혼했으나 둘 사이의 연심은 식지 않은 채였다.
 
불륜으로 이어진 둘의 사랑은 트로피 부인 신세였던 다이애나에게 상처를 주었고 급기야 엘리자베스 여왕을 못된 할망구 이미지로까지 만든 왕실의 대표적 스캔들이 되고 말았다.
 
찰스 왕세자의 사생활을 폭로한 자서전 출간과 별거, 결국 이혼에 이르기까지 다이애나는 불륜 남편에 피해입은 여성의 대표 아이콘이 되었고 온세상 여성들이 동정하고 부러워하는 살아있는 신데렐라가 되었다. 유럽과 아메리카, 아시아의 모든 미디어가 눈이 벌게져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상업적 핫아이템으로 다루며 야단법석이던 어느 날, 마침내 예고도 없이 잔인한 운명의 그날이 닥쳤다.
 
이혼한 지 1년여 후인 1997년 8월, 한가로운 휴가철 어느날 새벽. 헤롯 백화점 소유자의 아들인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도디 알 파예드와 함께 타고 가던 벤츠 승용차가 터널 안에서 전복된 것이다. 오토바이를 탄 파파라치들에게 쫓기듯 과속하던 중 당한 사고였다. 즉사한 남자친구와 달리 생명줄이 간신히 붙어 있었던 그녀는 파파라치들이 터뜨리는 무심한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숨져갔다고 한다.
 
불의의 사고는 곧 영국 첩보부 MI6의 왕실체면 수호용 공작의 산물이라는 그럴듯한 음모론으로 포장됐다. 영국 왕실이 배후이고 찰스 왕세자가 총감독인 드라마틱한 살인사건이라는 스토리다. 벌써 십수년이 훌쩍 지났고 왕세자비 자리는 왕세자의 첫사랑 여인이 당연한듯 차지하고 있지만 이 음모론은 찰스 왕세자의 타고난 명성을 변기 속에 쳐박았고 등극 날짜 택일만 남은 것으로 여겨졌던 왕위 승계마저 “전처 소생 두 왕자와 견줘라”는 여론의 도마에 오르게 했다. 만일 다음 영국 왕의 이름이 윌리엄이나 해리나 앤드류라면? 찰스는 복성군만큼은 아니어도 아주 오래오래 원통해 할게 틀림없다.
 
이런 역사 이야기를 되새기다 보면 음모론은 시작은 황당하나 역사를 바꾸는 위력이 있다는 실감에 허걱, 놀라게 된다. 동아시아 손바닥만한 조선의 한 사가와 유배지에서 477년 전(경빈과 복성군의 죽음)에 그러했다. 또 유럽의 늙은 호랑이(여왕의 띠)가 있는 영국 왕실에서 깜짝 벌어질 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도 더 늦기 전에 경제의 중산층과 함께 인문학 교양지식의 중산층을 늘려 '청와대 자작극' '백악관 유도설' '유태인 기획설' 등 부질없는 음모론의 횡행에 대처하자는데 한 표 던진다. [트렌드아카데미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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