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경북 울진군 불영사 비구승으로 계를 받고 공부 중인 스님은 뜻 밖에 어린 시절 교회 다닌 이야기를 꺼냈다. 살짝 미소를 머금은 표정은 맑고 향기로워 보였으며 이야기하는 투는 공부 잘한 모범생의 뉘앙스를 풍겼다. 80년 대 초 하나님 믿는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다가 최류탄 펑펑 터지는 아비규환 속에서 헤매며 ‘이 곳에 신의 정의가 있는가?’ 회의와 번민의 구렁텅이를 헤매던 내 젊은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질끈 감았던 눈을 떠 스님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비구승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법이 아니라는 동료의 지청구를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스님의 입술에까지 레이저를 쏘아 댔다.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또 어떤 말들이 쏟아져 나올까? 가슴이 요동쳤다.
“결국 깨달았죠. 기독교나 불교나 진리는 다 통한다는 걸. 예수님이 또 다른 부처님이라는 걸 깨닫고 얼마나 즐거웠는지 몰라요. 결국 내 안에도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계실 수 있다는 진리도 이해하게 됐어요. 출가 이후 너무 편안하고 행복했어요. 불경을 공부하면서 진리의 깊은 바다 속을 탐험하는 기쁨도 너무 컸어요. 성경도 위대하지만 불경도 위대하다는 걸 알게 됐죠.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주는 위안도 크지만 사람이 처한 각자의 상황에 따라 위로가 되는 불성에 대한 믿음도 너무 좋아요.”
‘불교 망하라’며 길상사 땅 밟기를 한다, 불교 관련 예산을 깎은 친 기독교 여당을 성토한다, 마치 전쟁이라도 벌이듯 기독교와 불교가 으르렁거리는 판국에 이런 한갓지고 평화로운 담론이라니. 나는 한 동안 멍하니 이 순진한 스님은 어느 별에서 오셨나, 뜨악했다.
하지만 녹차와 함께 내 온 떡 한 조각을 베어 물다가 문득, 술술술 풀려 나오는 지혜의 실타래가 가슴 한 켠에 차곡차곡 쌓이는 걸 느끼며 스님의 목소리에 매료됐다. 그러다 뜨거웠던 믿음의 시절은 가고 지금은 시늉만 교인으로, 나들이 삼아 교회 문턱만 들락거리는 꼬락서니에도 절집을 그저 문화유적 정도로만 취급하는 나의 처지가 갑자기 자각되어 민낯이 붉어졌다.
“혹시 연세가...법명은?” 고작 궁금한 게 이런 거더냐, 다시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스님은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아...죄, 죄송합니다. 안 여쭙겠습니다...저 그런데 혹시 이 이야기를 칼럼 에 써도 될까요?” 갈수록 점입가경이라더니 쪼다육백이 따로 없다. 내 눈은 이미 밑으로 쳐박혀 황송한 표정의 좋은 액세서리가 됐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눈이 그예 바닥에 붙어버렸다. 스님이 그 향그로운 입을 여셨다. “아....뭐 제 이야기가 도움이 되신다면....” 눈은 여전히 마주치지 못한 채 나는 다시 재우쳐 “저...연세가 혹시 서른 몇?....” 입정을 놀렸다. 민망함이 1톤의 무게로 가슴을 짓눌렀지만 ‘동안의 지혜’가 호기심거리로 다가온 속물 근성이 끄응, 기를 썼다.
차라리 고향을 물을 걸. 후회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정말 못말리겠다는 듯 스님이 하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뭐...마흔쯤?” 아, 부질없는 나이타령이여. 서울 스타벅스 커피숍에선 ‘숙녀의 나이를 묻는 게 아니’라며 앞장서 게거품 무는 나와, 이 경건한 선승, 학승들의 도량에서 비구승의 나이가 궁금해 깨방정 떠는 나는 대체 같은 인간일까?
뭔가 만회를 해야겠다는 조바심의 포로가 된 나는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저...며칠 전 현각 스님 인터뷰를 보니까, ‘종교는 윤리다’하는 화두를 꺼내시던데요?” 스님의 표정이 활짝 밝아졌다. “네, 저도 현각 스님 말씀에 공감해요. 기독교와 불교는 생각하는 차원이나 방법이 서로 다를 뿐이죠. 종교와 윤리도 모두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요?”
십 수 년 간 내 이성을 어지럽히던 의구심이 춘삼월 눈 녹 듯 말끔히 사라졌다. 번뇌와 번민, 쓸데없는 고민의 잡동사니도 불영사 풍경소리에 텅, 비워졌다. 내 머릿속에 예수님과 부처님이 어깨동무를 하고서 하하낄낄 친구처럼 어울리는 영상이 떠올랐다.
아, 조반니노 까레스키의 ‘돈 까밀로 신부와 빼뽀네 읍장’ 스토리 같은 드라마나 소설을 한 편...잘 팔릴 거 같은데? 거지같은 속물근성이 또 꿈틀거렸다. 아! 불사(佛事)가 아니라 아뿔사! 중생의 업보여.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낳는다’는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도...
[트렌드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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