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징 = 조용성 특파원) 리커창(李克强) 상임 부총리는 1955년 7월 안후이(安徽)성의 성도 허페이(合肥)에서 태어났다.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 후진타오(胡錦濤) 현 국가주석, 우방궈(吳邦國) 전인대 위원장 등도 안후이 사람이다.
리커창은 어릴 때부터 수재였다. 성적이 뛰어났던 그는 소학교시절 줄곧 상위권을 달렸다. 하지만 그가 중학교에 입학했을때 이미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대혼란속에 빠져들었고,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불가능했다. 학생들은 홍위병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수업을 거부했다.
리커창은 문화대혁명에 동참하는 대신 부친의 권유로 안후이성 문사관(文史館)에서 일하던 리청(李誠•1906~77)을 찾아가 제자가 됐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사기’ ‘한서’ ‘후한서’ ‘자치통감’ 등 중국고전을 배웠다. 리청은 총명한 리커창이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라고 여겨 매일 구두로 국학지식과 천문지리를 전수했고 한다. 동시대 학생들이 문화대혁명기간에 학업공백을 빚었지만 리커창은 오히려 운좋게도 일대의 유학자를 5년간 모시고 착실하게 기초를 닦은 것.
고교를 마치고 7개월 뒤인 1974년 3월 그는 농촌으로 하방(下放)됐다. 리커창은 안후이성 펑양(鳳陽)현의 다먀오(大廟)공사 둥링(東陵)대대로 배치됐다. 펑양현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고향이다. 그는 이곳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연말이 되면 절반 정도 외지로 나가서 구걸을 하고, 5월 보리를 수확할 때가 되서야 돌아오는 비참한 삶을 목격했다. 구걸을 수치로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0살 청년 리커창은 그 지역의 가난을 타파하기 위해 과학적인 방법으로 농사를 짓는 일에 앞장서 농민의 지지와 공사 당 위원회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지역의 빈곤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자신이 처한 현실의 한계를 느끼며 꿈을 가다듬었다. 리커창은 하방 2년 만인 1976년 하방조직의 당 지부 서기가 됐다. 1976년 5월 입당한 뒤 얻은 첫 관료직이었다.
◆현실에 뜻을 둔 베이징대 법학도
1977년 8월 중국은 대입시험을 부활시켰다. 4개월 뒤인 그해 12월 치러진 첫 대입시험에는 무려 670만명이 응시했지만 이 중 대학에 들어간 사람은 27만3000명에 불과했다. 리커창은 당시 29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베이징대 법학과에 합격했다.
이때 베이징대학에서는 전국의 수재들이 입학했지만 이들과의 경쟁에서도 리커창은 단연 두각을 나타냈고 졸업할 때 리커창은 법학과의 성적 우수생 4명중 한명이었다.
1982년 베이징대학을 졸업한 후 리커창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의 동기들은 잇달아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리커창 역시 미국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베이징대학교 당위원회 부서기인 마스장(馬石江)이 리커창의 리더로서의 재능을 중히 여겨 학교에 남아 공청단 베이징대학 위원회 서기를 맡아 1만명의 공청단원들을 이끌어줄 것을 권유했다. 그는 이를 계기로 이후 무려 16년간 공청단에서 근무하게 된다.
베이징대 공청단위원회 서기로 그는 강좌를 개설하고 문화활동을 조직하며 소속 공청단을 역동적으로 이끌었다. 취임 후 첫날 그는 정례회의는 1시간을 초과하지 않아야 하며, 초과하면 스스로 회의장을 나가도 좋다고 선포했다. 사상논쟁과 사변이 많았던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그가 1년여동안 주관한 정례회의는 항상 30분 내에 끝났다.
리더십을 인정받은 그는 1983년 베이징대 지부에서 공청단 중앙서기처로 자리를 옮겨 공청단 중앙학교부 부장 겸 전국학생연합회 비서장을 맡았다. 리커창과 후진타오 주석(당시 공청단 제1서기)의 인연은 이 때부터 시작된다. 후진타오의 눈에 든 그는 그해 연말 공청단 서기처 후보서기에 임명됐다. 후 주석은 그의 조리 있는 말솜씨와 박식함에 매료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1985년 후진타오가 구이저우(貴州)성 서기로 옮겨가면서 리커창은 서기로 올라섰다. 당시 서기처 서기는 8명으로 구성됐으며, 제1서기가 쑹더푸(宋德福, 2007년 사망)였고, 서기로는 류옌둥(劉延東), 리위안차오(李源潮), 장바오순(張寶順), 리커창, 뤄쌍(洛桑), 류치바오(劉琦寶) 등이 포진했었다. 이들은 현재 공청단파를 형성해 중국 정가를 주름잡고 있다.
◆후주석의 정치적 후계자로 발탁
후 주석은 1992년 50세의 젊은 나이에 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랐다. 후 주석의 당시 임무범위는 공청단과 노동조합이었다. 후주석은 1993년 자신이 신임하는 리커창을 공청단 제1서기로 발탁한다.
리커창은 1993년 5월 최연소(38세)로 공청단 제1서기에 임명됐다. 후 주석이 42세의 나이에 공청단 제1서기에 임명된 것보다 4년 빨랐다. 이후 1998년까지 5년동안 리커창은 당시 공산당 중앙서기처 서기이던 후진타오에게 직보를 하며 한층 깊은 신뢰를 쌓게 된다.
후진타오를 7년동안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서인지 리커창의 근무 자세는 물론 성격까지 후 주석에 닮아 있다. 성실함과 함께 몸가짐에 흐트러짐이 없는 것은 물론 윗사람에게 고분고분하고 지시에 잘 따르는 것도 영락없는 후진타오의 모습이다. 이후 리커창은 ‘리틀 후’로 불렸다.
리커창은 공청단에 근무하는 동안 그는 적잖은 업적을 남겼다. 우선 빈곤지역 학생들이 돈이 없어 배움의 기회를 잃지 않도록 돕는 희망공정(希望工程) 사업을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공청단 중앙이 운영하는 중국청년여행사를 발전시켜 궤도에 올려놓은 것도 리커창이다.
그는 공청단 시절 베이징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1985년 ‘중국 경제의 3원 구조를 논한다’라는 논문을 썼다. 이는 1991년 중국사회과학원이 격월간으로 발행하는 권위 있는 학술지 ‘중국사회과학’ 제3기에 실렸으며 중국 경제학계의 최고상인 ‘쑨예팡(孫冶方) 경제과학상 논문상’을 받았다. 이어 1988년엔 ‘농촌공업화 : 구조전환 과정에서의 선택’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994년에는 박사학위마저 취득했다.
◆빛나는 주택정책의 성과들
공청단에서 승승장구하던 리커창은 1999년 최연소로 허난(河南)성 대리성장에 임명됐다. 후진타오가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에 오른 지 2개월 뒤인 2002년 12월에 허난성 당 서기 겸 성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2004년까지 5년간 허난성 성장으로 재직하며 성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1990년대 초 31개 성 중 28위에서 중위권인 18위로 올려놨다. 1998년 4308억위안이던 허난성의 지역 총생산은 6년 만에 8554억위안으로 무려 2배 가까이 늘었다.
허난성에 부임할 당시 현지의 많은 관리들은 당서기가 너무 젊다며 불안해했지만 그의 성과는 리커창이 중임을 감당할 만한 그릇임을 증명해 주었다.
이어 2004년 12월엔 랴오닝(遙寧)성 당 서기로 이동한다. 랴오닝성 당 서기로 부임한 뒤에는 ‘모든 사람은 잠잘 집이 있어야 한다(人人有房住)’라는 구호 아래 푸순(撫順)시의 판잣집 100만호의 주택개량사업을 벌여 인민의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2년에 걸친 대대적인 주택개량사업 끝에 184만5000호의 집을 개량하고 50만호의 주택 문제를 해결했다. 또한 동북진흥계획의 세부항목으로 다롄(大連), 잉커우(營口), 단둥(丹東) 등 연해공업지구 개발을 위한 ‘5점1선(五點一線)’ 계획을 추진하며 3년 만에 랴오닝성이 ‘조화사회’의 선두로 올라서게 했다.
지방정부 시절 리커창은 큰 뜻을 품었던 만큼 청렴한 자세를 견지했다고 한다. 공무와 관련된 연회가 아니면 정중히 거절했으며 특별한 일이 없으며 대부분 비서와 함께 간단한 식사를 했다. 2006년 부친상을 당했을 때는 현지 관리들이 보낸 선물을 완곡하게 거절해 돌려보내는 등 철저한 자기관리를 했다.

◆시진핑의 벽을 못넘은 황태자
후진타오 주석과 오랜시간 함께 일해 후 주석의 복심을 누구보다 잘 알아채며, 후 주석이 하지 못하는 말이나 행동을 거침없이 쏟아내던 그는 국내외 언론의 큰 주목을 받는다. 리커창은 당시 명실공히 차기 국가주석 1순위 후보였다. 2006년 12월 ‘뉴스위크’ 아시아판도 ‘내일의 스타’ 특집에서 리커창을 중국의 미래 지도자로 소개했다. 시진핑(習近平) 당시 저장(浙江)성 서기는 안중에도 없었다. 중화권 언론도 일찌감치 리커창을 주목했다. 심지어 일부 매체는 그가 허난(河南)성과 랴오닝성의 당 서기로 재직할 때 공공연하게 ‘내일의 태양’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오카다 가쓰야 전 일본 민주당 대표도 이에 앞서 2005년 랴오닝성을 방문한 뒤 “리 서기가 장차 중국의 미래 지도자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리커창은 2007년 10월 제17차 당 대회에서 권력서열 7위로 시진핑(6위)에 한발 밀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입성한다. 시진핑이 상무위원에 진입하게 될지, 게다가 리커창이 시진핑의 뒤에 서게 될 것을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리커창이 시진핑에 밀린 요인으로 크게 세가지 이유가 꼽힌다. 첫번째는 후진타오 주석이 자신의 후계자로 자신의 최측근 인사를 지명하는 데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자칫 퇴임 후 ‘자기 사람만 챙겼던 지도자’로 기억될 까 두려웠다는 것. 두번째는 장쩌민 전 주석과 쩡칭홍(曾慶紅)전 부주석 등 원로그룹이 공청단파의 급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리커창을 비토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후 주석의 임기동안 공청단파는 지방과 정부의 요직을 차례로 접수해 왔다. 세번째로 군부에서의 지지를 받고 있는 시진핑과 달리 리커창은 군부내 네트워크가 부족했다는 점이 꼽힌다. 이와 별도로 리커창의 업적이 다소 부족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변이 없는 한 시진핑은 2013년 3월 전인대에서 국가주석에, 리커창은 국무원 총리에 각각 선임돼 중국의 향후 10년을 이끌어 나갈 투톱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