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용품을 일본에 수출하는 중소업체 A사의 사장은 요즘 좌불안석이다. 전례없는 엔저현상으로 수익률이 40%가까이 감소한 상황에서 기존의 거래처가 절반으로 줄었다. A사 사장은 “얼마전까지 거래하던 회사가 갑작스런 이별을 통보했다”며 “알고보니 다른 외국계 기업과 거래를 맺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대기업의 소모성자재구매대행(MRO) 사업 규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대기업 계열사가 떠난 자리를 ‘중소기업’이라는 가면을 쓴 외국계 비재벌 대기업들이 차지하면서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한 본래 취지가 무색해진 까닭이다.
5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조달청은 지난해 11월 미국계 사무용품 업체인 오피스디포와 MRO 공급계약을 체결, 전국 10개 권역 중 6개 권역에서 2년간 MRO 78억원어치를 공급키로 했다. 하지만 오피스디포는 전 세계 60개국에 1600여개 매장을 가진 세계적인 사무용품 업체로 지난해 매출만 115억 달러(약 12조8000억원)에 달하는 글로벌 대기업이다.
MRO업계 관계자는 “최근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한 여론이 확산되면서 대기업들은 MRO 사업에서 손을 뗐다”면서 “하지만 그 자리를 오히려 글로벌 기업이 차지하고 있는 웃긴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회분위기와 여론에 휩쓸려 MRO 사업정책을 막무가내로 밀어부친 결과”라고 덧붙였다.
실제 오피스디포는 미국 본사가 아닌 가맹점 공급 계약을 통해 중소기업으로 교묘하게 탈바꿈해 조달청과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조달청의 허술한 입찰 참여 기준 관리와 법망의 사각지대를 이용한 셈이다.
조달청 관계자는 “오피스디포 가맹점이 공급자 자격이 있는지 선정 당시까지 검토했다”며 “현행법상으로는 가맹점을 중소기업으로 보지 않을 근거가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중소업계는 사업조정의 원래 취지와 어긋나는 행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 기관인 조달청이 외국계 대기업인 줄 몰랐다는 점은 넌센스”라며 “꼼꼼하지 못한 입찰 기준으로 외국 대기업 배만 부르게 한 꼴”이라고 꼬집었다.
이 관계자는 “오피스디포를 제외한 외국계 MRO기업 대다수는 총판 형식으로 기존 대리점들에 납품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며 “골목에서 대형마트 자리를 일본계 편의점들이 장악하는 것과 똑같은 맥락”이라고 강조했다.
즉 MRO 중소기업들은 대기업 철수로 혜택을 받기는 커녕 중소기업으로 변신한 글로벌 대기업들의 사업 확장으로 더 많은 손해를 보게된 셈이다.
동반위 관계자는 “MRO 사업규제로 중소 MRO 기업이 도움을 받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다만, 일부 외국계 MRO가 대기업이 빠진 자리에 들어오는지에 대해선 상세한 시장 분석과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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