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n to Run> 리더의 결단이 성공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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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3-12-3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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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리더의 역할은 ‘선택’이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선택에 대한 평가는 단기간에 내려지지 않는다. 지금은 성공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수십년, 수백년이 지난 뒤에는 실패로 귀결될 수 있다. 성공은 아닐지라도 실패가 아닌 선택을 하고 싶은 게 리더의 속내이지만,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내포할 지는 리더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 지 수일이 지난 어느 날. 이활 한국무역협회 회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 경제정책자문위원회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았다. 최고회의는 혁명정부의 경제정책 수립을 위한 의견을 듣기 위해 이 회장과 전택보 천우사 회장을 지명해 면담을 요청한 것이다.

무역협회를 포함해 대한상공회의소와 방직협회, 건설협회 등이 참여하고 있던 경제단체 경제협의회 운영위원회가 쿠데타 발발 뒤 경제계의 총의를 담은 경제정책 원칙에 대한 건의서를 군사혁명위원회에 제출한 직후였다.

당시 국회도서관 자리에서 경제인 대표들은 박정희 소장을 만났다. 이날 회담은 오후 2시에 시작해 밤 9시까지 장장 7시간이나 계속됐다. 이 자리에서 박 소장도 “혁명은 군인이 했지만 앞으로는 경제인이 경제를 부흥시켜 구국해야 한다”며 경제개발의 의지를 되풀이 해가며 강조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박 소장을 비롯한 부관들이 모두 무장을 한 채 참석해 왠만한 사람들이라면 말 한마디 꺼내기도 어려운 위협적인 분위기였다. 이 자리에서 박 소장은 이 회장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박 소장에게 무역입국론을 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면담 후 박 소장은 이 회장을 최고회의 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 박 소장의 최고회의는 그해 7월 22일 설립한 경제기획원을 통해 무역협회가 제출한 건의서를 대부분 받아들여 수출 우선주의와 개방정책, 보세가공무역 등이 포함된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입안, 시행했다.

1962년부터 1986년까지 총 5차례에 걸쳐 추진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철저한 수출 주도형 경제체제를 지향했다.

박 소장은 경제부흥 정책의 중심으로 내수 위주로 잡을 수 있었다. 결과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일단 당시 그가 수출을 선택한 배경으로는 배를 굶는 사람이 넘쳐나고 있던 한국이 처한 한계 속에서 국내라는 울타리에서 경제를 부흥시키기에는 불가능했고, 기업인을 포함한 경제계 인사들의 의견을 폭 넓게 받아들임으로써 해외시장에서 부를 쌓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 위주의 산업정책으로 인해 부의 양극화가 극대화 됐다는 비판도 받고 있지만, 어쨌건 건국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종합경제개발계획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덕분에 한국은 만성 빈곤국에서 세계 10대 경제강국으로 탈바꿈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초대 대통령을 지낸 조지 워싱턴은 국내 여러 세력의 단합에 노력하고, 헌법을 실제 정치에 반영시키는 한편 여러 나라와의 국교를 조정하는 일에 주력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중대한 잘못된 선택을 했으니, 바로 ‘위스키 폭동’이다.

지난 2010년 발간된 ‘대통령의 오판’이라는 책에 따르면 워싱턴 대통령은 독립전쟁 후 짊어지게 된 막대한 지역 정부의 부채를 중앙정부 차원에서 청산하기 위한 재원을 얻기 위해 가내수공업으로 생산되는 증류주에 세금을 부과하기로 하기로 결정했고, 1791년 의회는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시골 오지 서민들의 반발을 사며 폭동을 불러 일으켰다. 3년간 지속된 폭동을 무력행사까지 동원하는 연방정부의 가혹한 행태에 분노한 유권자들은 연방주의자들을 권력에 굶주린 전제주의자로 여기게 돼 워싱턴 대통령의 정당에 등을 돌리고 토마스 제퍼슨을 중심으로 창당된 민주공화당을 지지했다. 민주공화당은 1801년부터 1825년까지 백악관을 지켰고, 이 과정에서 존재감을 잃어간 워싱턴 대통령의 사람들은 결국 몰랐했다.

여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워싱턴 대통령과 연방주의자들이 사라지면서 미국 중앙정부는 60여년 동안 주 정부에 밀려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1861년 남북 전쟁이 발생했고, 북군이 승리하면서 중앙정부는 미국 정치계의 주요한 실세로 복권했다.

위스키 폭동세력도, 워싱턴 대통령도 이런 결과까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한 점은 워싱턴 대통령이 위스키에 세금을 물리기로 선택한 이후부터 이러한 결과가 진행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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