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대로였다. 빈곤 타파를 통해 인간 사회의 진보를 추구한 영국의 경제학자 '앨프리드 마셜'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가진 자'다. 단순히 부(富)에 대한 고민만 하지 않았다. 답변 하나하나에는 '인적 자본'의 키워드가 녹아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이었던 '사람이 먼저다'와 일맥상통한다. 역시 '학현학파의 대표 주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3일 서울 종로구 집무실에서 홍장표 대통령 직속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만난 지 1분 만에 든 첫인상이다.
분배를 중시하는 학현학파는 성장 중심의 서강학파와 함께 한국 경제학계의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학현학파의 시초는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가 1982년 만든 '학현연구실'이다. 다만 두 학파는 정통학파라기보다는 인적 네트워크 성향이 짙다. 현 정부의 대표적인 학현학파로는 홍 위원장을 비롯해 이제민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과 장지상 산업연구원장, 강신욱 통계청장, 박복영 청와대 경제보좌관 겸 신남방정책특별위원회 위원장 등이 꼽힌다.
이 중 홍 위원장은 J(문재인 정부 경제정책)노믹스의 핵심인 '소득주도성장(소주성)' 이론을 집대성했다. 소주성은 문재인 정부 집권 초부터 지금껏 가장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는 정책이다. 특히 2018년 6월 15일 통계청의 '5월 고용지표'가 발표된 직후부턴 '고용 참사'의 원흉으로 소주성이 지목됐다.
소주성이 다시 주목받은 것은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쇼크' 때다. 전 세계가 동시다발적 ‘R(Recession·경기침체)’의 공포에 직면하자, 각국은 '컨틴전시 플랜(비상 계획)'을 꺼내들었다. 전례 없는 위기에 전례 없는 대책인 이른바 '헬리콥터 머니(중앙은행이 새로 돈을 찍어내 시장에 공급하는 정책)'로 표현되는 세계발 양적완화 시대가 바짝 다가온 것이다. 이는 전 국민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의 숨통을 여는 분기점으로 작용했다.
이에 대해 홍 위원장은 "혁신적 포용국가의 길은 어떤 정권이 들어와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미·중 갈등을 비롯한 지정학적 갈등이 한층 심화된 현 상황에 대해 "글로벌 밸류체인(가치사슬)이 바뀌는 것"이라며 "내수 시장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 추격형 경제에서 '선도형 경제'로 바꿔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정부의 컨틴전시 플랜(비상 계획)인 확장적 거시 정책에 거듭 힘을 보탰다. 특히 홍 위원장은 "K-방역이 브랜드가 되면서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주식 저평가)'가 사라졌다"고 확신했다.
홍 위원장은 한국판 뉴딜에 구제(Relief)만 있고 '제도개혁(Reform)이 없다'는 비판에 대해 "정부가 발표한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의 핵심은 '회복'이다. 특히 내수 회복 포인트가 들어가 있다. 문 대통령이 추진하는 전 국민 고용보험은 '제도개혁' 문제"라고 반박했다.
21대 국회 개원 직후 보수 정당인 미래통합당은 진보 어젠다인 '기본소득' 이슈를 치고 나갔다. 홍 위원장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며 "요새 더 열심히 공부한다. 못 따라가면 야당에 뺏길 것 같아서"라고 말했다. -다음은 홍 위원장과의 대담 내용이다.
◆"코로나19 위기, 시대전환 변곡점"
-실물·금융의 복합 위기인 '코로나 팬데믹'이 전 세계에 역성장의 그림자를 몰고 왔다. 경기 순환적 위기와 구조적 위기 등 한꺼번에 터진 결과로 보인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경기 순환적 위기와 구조적 위기가 섞였다. 경기 하강기에서 조금 풀리려던 세계 경제가 침체의 길로 다시 돌아선 것 같다. (이 위기를 넘기면) '시대전환'을 상징하는 변화로 다가올 것이다. 다만 어두운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정부와 민간이 합심해야 할 때다."
-코로나 팬데믹 쇼크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역시 '고용 위기'다.
"올해 4월 고용통계를 보면, 전년 동월 대비 47만6000명이 감소했다. 일시 휴직자는 148만5000명에 달한다. 이분들은 언제든지 직장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 이후 최악의 고용위기가 오는 것이 아니냐는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
"확신이 섰다. 과거 외환위기 때 대규모 정리해고가 단행됐다. 인적 자산이 엄청나게 붕괴됐다. 후유증이 굉장히 많았다. 답은 인적자본이다. 고용 유지가 최급선무다. 노동계에선 당시 대규모 정리 해고로 노사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극한 관계까지 갔다고 했다. 이런 일이 또다시 반복돼선 안 된다. 첫 출발은 '사람을 지키자'다. 사람이 자산이다."
-자칫 산업 구조조정이 지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영업이익으로 은행 이자조차 내지 못하는 이른바 '좀비기업'이 외환위기 이후 약 35%에 달하지 않나.
"외환위기와 현 위기에는 차이가 있다. 외환위기는 제조업과 산업 부문에서 경쟁력 약화가 드러났다. (반면) 이번에는 관광·호텔·항공 등 서비스 산업부터 위기를 맞았다. 이후 제조업과 자동차, 조선 등 기간산업에서 약한 고리를 드러냈다. 위기를 겪는 과정에서 정부가 일정 부분 구제금융을 지원해도 한계기업은 어쩔 수 없이 정리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거다."
◆"한국, 미·중 갈등 최대 피해자"
-'포스트 코로나' 시대로 접어든 시점에 미·중 갈등이 또다시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최근엔 문재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초청에 응하면서 중국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중 무역마찰의 최대 피해자는 한국이다. 다만 이 국면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를 봐야 한다. 국제통상 질서가 달라질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와 지난해 미·중 무역 갈등을 겪으면서 '슬로벌라이제이션(느린 세계화)' 시대로 갔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는 세계화가 중단됐다. '탈세계화' 얘기가 본격적으로 나오지 않나. 그야말로 가치사슬이 바뀌는 거다. 내수를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
-내수 위주로 가다 보면 과연 '5000만 시장'으로 고도성장이 가능하겠느냐는 비판도 있다.
"수출 중심에서 내수 중심으로 당장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 과거 중국은 수출주도 경제로 불렸다. 지금은 수출 비중이 10% 미만으로 떨어졌다. 한편으로는 '반도체를 국내에서만 팔아라'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수출 리더 기업은 분명히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K-방역 등을 넘어 'K-경제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문 대통령도 그 일환으로 '한국판 뉴딜'과 '전 국민 고용보험'을 꺼냈다. 문제는 디테일이다.
"최대 이슈는 한국판 뉴딜이다. 오는 7월 종합 계획을 발표한다. 한국판 뉴딜은 두 가지 차원에서 나왔다고 본다. 하나는 국난 극복인데, 핵심은 일자리 창출이다. 포스트 코로나의 장기적인 비전도 들어있다. 새로운 산업이 당연히 만들어지지 않겠나. 문 대통령도 추격형 경제에서 '선도형 경제'로 전환하겠다고 했다. 선도형 경제는 20년 전부터 학교에서 얘기해온 것이다. 드디어 기회가 온 것 같다.(웃음)"
◆"그린뉴딜, 靑내부 반대…사실 아냐"
-선도형 일자리는 어떤 분야를 말하는 것인가.
"대표적으로 다른 나라에서 경쟁력이 취약한 부분이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진단키트 등 바이오 분야에서 명확히 확인됐다. 반도체 분야도 선도형으로 생각한다. K-방역이 브랜드가 되면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얘기를 더는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사라진 것이다."
-최근에는 그린 뉴딜이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다. 시일이 오래 소요될 거 같은데.
“문재인 정부에서 시작은 할 수 있어도, 마무리는 지을 수 없을 것이다. 워낙 큰 주제다. 지금은 민간이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안 된다. 정부가 돈을 풀 수밖에 없다. 더불어 관련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 그 다음에 선도사업이 될 수 있도록 해야만, 실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정부는 돈을 풀면서 시장을 만든 뒤 민간 투자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게 키포인트다."
-그린 뉴딜을 놓고 청와대 일부 참모진들이 반대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뉴딜의 범주가 확장하면서 선택과 집중에 실패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한국판 뉴딜에는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 바로 '휴먼 뉴딜'이다. 대표적인 게 '전 국민 고용보험' 가입이다. 국민 취업 지원제도인 한국형 실업부조도 마찬가지다."
-그린 뉴딜을 놓고 이명박(MB) 정부의 녹색성장과 무엇이 다르냐는 비판도 있다.
"철학이 다르죠.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이다. 생활이나 안전에 중점적으로 투자하겠다는 것이다. 예컨대 건축물 그린 리모델링 활성화는 공공 투자가 민간 투자를 끌어내는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처음부터 끝이 전부 사람이다. 소주성의 철학이기도 하다."
-일각에선 한국판 뉴딜이 '구제'에 치중했다는 지적이 있다.
"원래 뉴딜은 구제(Relief)·회복(Recovery)·제도개혁(Reform)의 3R로 돼 있다. 한국판 뉴딜에는 3R 요소가 다 있다. 제1∼6차 비상경제회의는 '구제' 내용이 많다. 정부가 발표한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의 핵심은 '회복'이다. 특히 내수 회복 포인트가 들어가 있다. 문 대통령이 추진하는 전 국민 고용보험은 '제도개혁' 문제다."
◆"전 국민 고용보험=뉴딜 제도개혁"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전 국민 고용보험도 소주성 정책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일단 '단계적 확대'에 방점을 찍었다. 특히 가입률이 0.3% 수준인 자영업자 가입 문제는 여전히 난제다.
"쉬운 문제는 아니다. 현재 고용보험 가입률은 절반밖에 안 된다. 이 비율을 높이려면, 특수고용직과 자영업자 가입을 늘려야 한다. 문제는 '소득 파악'이다. 결국 법 개정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대표적으로 국세청은 이들에 대한 소득 파악을 그나마 하는 기관인데, 정보 제공이 굉장히 제한적이다. 국세기본법을 보면, 굉장히 까다롭게 돼 있다."
-여당 일부 의원들 사이에선 '자영업자안정기금' 등이 아이디어 차원에서 나온 것으로 안다. 현재 존재하는 일자리안정자금 이외 별도의 자영업자를 위한 기금을 만드는 안에는 찬성하나.
"일자리안정자금을 대폭 확대하면 된다. 지금도 자영업자가 임의가입 형태로 고용보험에 들어올 수 있는데, 정부가 1인 자영업자의 경우 재정을 통해 30∼50%를 지원하고 있다. 저소득층 근로자를 고용보험 틀에 넣는 방식도 똑같았다. 자영업자에 못 해줄 이유가 뭐가 있겠나.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
-소주성에 관한 질문을 안 할 수 없다. 소주성 정책을 만든 설계자인데, 지난 3년간의 결과물 등에 대해 총평을 해달라.
"소주성을 둘러싸고 말이 많았다. 사실 생소한 용어는 아니다. 많은 분들이 '소주성=최저임금'이라고 알고 있는데, 소주성에는 45개의 큰 과제가 있다. 핵심은 우리 사회에 만연된 불균형과 (낮은) 가계소득 등을 치유해야만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성과 지표가 이제야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지표인가.
"논란이 된 지표가 제일 처음 나온 게 '2018년도 분기별 가계동향조사'였다. 당시 '분배 참사'라고 비판했는데, 지난달 발표된 '가계금융복지조사'를 보면 '지니계수·5분위 배율·상대적 빈곤율' 등이 개선됐다고 나오지 않았나. 지난 2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8년 국민계정(확정) 및 2019년 국민계정(잠정)'에 따르면 지난해 노동소득분배율(65.5%)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어떤 정권 들어와도 포용국가로 가야"
-사실 박근혜 정권에서도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소득주도형 정책인 '가계소득 증대세제 3종 세트'를 추진했다.
"최경환 (전) 부총리 시절에 내가 가서 설명한 거다(웃음). 그때는 그 용어를 그대로 썼다. 하지만 충분한 실행은 하지 않았다. 소주성은 결국 포용성장 정책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포용적 사회정책'을 정책선언으로 채택했다. 문재인 정부의 혁신적 포용국가론을 타깃으로 한 OECD의 첫 번째 사례연구 결과가 조만간 나올 것이다. 포용 국가의 길은 어떤 정권이 들어와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이다."
-소주성의 비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자영업자를 배제한 '임금 근로자'만을 위한 정책이다. 또 하나는 유럽의 임금주도성장과는 달리, 구조개혁을 수반하지 않은 반쪽짜리 정책이라는 것이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도 같은 지적을 했다.
"예전에 심 의원한테 다 설명한 건데…(웃음). 일단 용어부터 정리하면, 소주성은 임금주도성장을 참조했다. 다만 한국은 임금근로자 이외 자영업자가 25%가량이 되는데, '임금주도성장이 말이 되느냐'라는 지적이 있었다. 자영업자와 임금 근로자가 같이 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소주성이 나온 것으로 안다."
-전 국민 고용보험도 자영업자가 난제인데, 소주성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최저임금 인상과 동시에 자영업자 대책이 나왔어야 했다. 그러지 못했다. 자영업자 대책은 법과 시행령 개정이 많다. 마음 같아선 같이 시작하고 싶었지만, 뒤처졌다."
◆"기본소득 내세운 보수에 바짝 긴장"
-결국 문제는 돈이다. 증세 논쟁이 불가피한데.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역성장 위기를 맞았다. 각국이 재정 투입을 통해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그 속에서 재정 투입은 불가피하다. 그나마 우리는 재정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한 나라다. (3차 추가경정예산을 포함하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 전망치는 43.5%로, 2차 추경 기준(41.4%)보다 2.1% 높다."
-재정 건전성에 대한 우려는 없나.
"유럽연합(EU) 회원국도 코로나19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앞서 합의한 재정준칙을 일시 중단하는 데 합의했다.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 60%·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 3% 이내 등을 중단했다.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한 후 국제적으로 다시 논의될 것이다. 우리도 그 궤에 맞춰서 EU가 80∼90%로 늘리면 우리는 그보다 좀 낮춘 마지노선을 만드는 논의를 해야 하지 않겠나."
-결국 증세 논의는 지금 당장 안 해도 된다는 건가.
"예. 당장은. 개별소비세(개소세) 인하 연장 등 내수 진작에 찬물을 끼얹어버리니까. 지금은 그럴 여력도 없다. 당장에 국난 극복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보수진영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기본소득' 이슈를 치고 나가는 등 정치권 경쟁도 본격화할 것 같다.
"통합당이 우리가 연구하는 주제를 막 가지고 가니까, 더 열심히 해야겠더라고요. 바짝 긴장하고 있다.(웃음) 앞서 말한 시대 전환의 길목에 선 것이다. 세상이 달라진 거죠. 큰 분수령인 것 같다. 그래서 요새 더 열심히 공부한다. 못 따라가면 야당에 뺏길 것 같아서(웃음)."
[대담=아주경제 이용웅 편집인, 정리=최신형 정치팀장·신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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