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의 베트남 ZOOM IN] (36) "온 천하가 모두 형제" ···‧한베 교류사의 기본 정신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안경환 한국글로벌학교(KGS)이사장, 전 조선대교수
입력 2022-08-01 09:51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안경환 한국글로벌학교(KGS)이사장]



금년은 한국과 베트남의 수교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민족과 베트남민족은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유사성이 매우 많다. 베트남민족은 B.C 111년에, 한민족은 B.C 108년에 각각 한(漢) 무제(武帝)의 침략을 받아 지배를 받았고, 중국 유교 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아왔기 때문이다. 두 민족의 교류는 일찍이 고려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베트남 리(李) 왕조(1009~1225)의 왕자 2명이 각각 시기를 달리하여 한반도에 정착하여 정선(旌善)이씨와 화산(花山)이씨의 시조가 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고려 공민왕(1352~1374) 때에는 문익점(文益漸, 1328~1398년) 선생이 1363년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순제(順帝)의 미움을 받아 3년간 교지(交趾,Giao Chỉ)로 귀양을 갔었다. 1367년 2월에 귀양에서 풀려 교지에서 가지고 온 목화 씨앗이 한민족 복식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목화씨가 베트남으로부터 유입된 것이라는 사실은 두 민족의 교류사에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1992년 수교 당시 양국 간의 교역 규모는 5억 달러(4억 9천만 달러)수준에 불과했지만, 2021년에 807억 달러를 달성하여, 29년 만에 무려 161배나  증가하였다. 내년에는 한국과 베트남 관계에 이른바 'Triple Magic Number' 달성이 예상되고 있다. 즉, 양국 간 연간 교역액 1,000억 달러, 한국의 베트남 직접투자 누적 1000억 달러(2022년 5월 말 기준 790억 달러), 베트남 투자 한국기업 수 1만 개(2022년 5월 말 기준 9,288개) 달성이 유력한 것이다. 한국과 베트남이 외교 정상화 29년 만에 교역 규모가 161배 성장하였고, 베트남에서 한류가 인기를 얻고 있음은 900여 년을 교류해오면서 누적된 우호 협력관계가 두 민족의 역사에 면면히 전해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민족과 베트남민족의 관계를 살펴보면, 베트남과 한국은 4촌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정신적인 4촌, 둘째는 지형적인 4촌, 셋째는 역사적인 4촌, 넷째는 혈연적인 4촌 관계이다. 정신적인 4촌이라는 것은, 베트남은 전통적으로 유교 문화권에 속해있어 관혼상제에 관한 전통적인 의례가 우리와 동일한 데. 이는 중국 의례서인 “주례(朱禮)”, “의례(儀禮)”, “예기(禮記)” 3권의 책을 근간으로 하여 의례의 기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한, 한민족은 고려 광종 때인 958년에 과거제도를 도입하여 관리를 선발하였고, 베트남은 1075년부터 프랑스 식민시대인 1919년에 폐지하기까지 과거를 통해서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런 연유로 전통문화의 정신적 뿌리가 한민족과 같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친구 간에 신의를 지키는 정신적인 가치관이 서로 같아서 베트남을 방문하는 많은 한국 사람들이 문화적인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지형적인 4촌이라는 것은, 한반도와 베트남의 지도를 보면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국토의 모양이 모두 영어의 S자 형태로 비슷하고, 양국 모두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과 동으로, 남으로 연접해 있는 것도 지형적인 4촌이라 말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인 독도를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베트남 역시 인근 국가들과 동해상의 호앙사 제도(Paracel)와 쯔엉사 제도(Spratley)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있다. 동해를 일본은 ‘일본해’로, 베트남의 동해를 베트남은 ‘동해’, 중국은 ‘남중국해’로 부른다.
 
역사적인 4촌이라는 것은, 두 민족 모두 반만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중국으로부터 수많은 침략을 받았고, 유교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쳐 온 역사도 같다. 또한, 프랑스로부터 83년간(1862~1945)의 통치를 받은 피 식민지배의 역사, 1954년 7월 20일 제네바(Geneva)협정을 통해 북위 17도 선을 경계로 분단되었던 남북 분단의 역사도 같다. 수많은 외침 속에서도 민족 전통문화를 보존해 오면서 독립 국가를 유지해온 강인하고 끈질긴 민족성이 서로 같아 역사적인 4촌이라고 할 수 있다.
 
혈연적인 4촌이라는 것은,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는 혈연의 뿌리를 두 가지 갈래로 나누어 볼 수가 있는데, 하나는 베트남민족이 한반도에 내린 혈연의 뿌리가 있고, 또 하나는 한민족이 베트남에 내린 혈연의 뿌리가 있다. 한국에 있는 베트남 조상의 원류는 3가지 경우가 있는데, 첫째는 12세기에 정선(旌善)이씨 시조가 된 왕자의 망명 사건이다. 베트남 리(李) 왕조(A.D 1009~1225)에 7세의 나이에 즉위한 제4대 인종은 56년간 재위하는 동안, 1075년에 베트남 최초로 과거(科擧)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였고, 1076년에 국자감을 설치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당시 국경지방의 만족에 대한 지배권 문제로 중국 송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에, 리트엉끼엣(李常傑) 장군은 1075년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수륙양면으로 선제공격하여 광뚱성, 광시성을 점령하고 수천의 포로와 다량의 전리품을 노획하여 귀환하였다. 왕권 강화와 영토 확장에 큰 업적을 남긴 인종이 56년의 재위 끝에 적자(嫡子)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스러운 정국을 피해 북송을 거쳐 고려로 이주해 온 분이 이양혼(李陽焜)왕자로 정선(旌善)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둘째는 13세기에 화산(花山)이씨 시조가 된 왕자의 망명 사건이 있다. 리(李) 왕조 말 6대 임금 영종(1138~1175)이 겨우 3세에 왕위에 올랐고, 그 뒤를 이은 7대 고종(1176~1210) 역시 세 살 때 왕위에 올랐다. 충신 또히엔타인(蘇憲誠)이 어린 왕을 잘 보필하여 정치가 안정되어 갔으나, 또히엔타인이 사망하자, 고종은 정사를 게을리하고, 궁궐에서 연회를 일삼아 재정이 파탄되었고, 관리는 부패하여 농민 수탈이 극에 달하자 결국 민란이 발생하였다. 민란을 피해 지방 세력가 쩐리(陳李) 집에 머문 태자는 쩐리의 딸과 결혼하였고, 쩐리는 사병을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고 고종과 태자를 환궁시켰다. 고종이 1년 후 병사하자 16세의 태자가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8대 혜종(1211~1224)이다. 혜종은 병약하여 즉위 3년 만에 7세의 둘째 딸 펏낌(佛金)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당시 실권자인 쩐리(陳李)의 4촌 동생 쩐투도(陳守度)는 펏낌(佛金)과 8세의 당질 쩐까인(Trần Cảnh)과 결혼시키고, 왕위를 남편인 쩐까인에게 넘기라는 왕명을 내리게 하였다. 이로써 리(李) 왕조는 막을 내리고, 쩐(陳) 왕조가 시작되었다. 무혈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리(李) 왕조가 막을 내리자, 6대 영종의 아들 리롱뜨엉(李龍祥) 왕자는 1226년에 조상의 제기(祭器)를 배에 싣고 망명길에 올라 도착한 곳이 황해도 옹진군 화산리이다. 이들은 옹진군 지역에 침략해 오는 몽골 군사를 막아내었고, 고려 고종은 이용상 왕자에게 ‘화산군(花山君)’이라는 칭호와 함께 30리의 토지와 2,000명의 백성을 하사하여 조상을 모시며 살게 하였는데, 이분이 바로 화산(花山) 이씨의 시조이다.
 
셋째는 14세기에 고려를 방문하여 후손을 남긴 막딘찌(莫挺芝:1272~1346)의 후손이 있다. 막딘찌는 1308년 쩐(陳) 왕조(1225~1400) 명종(明宗:1314~1329) 때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재치있는 답변으로 원나라 황제로부터 양국장원(兩國壯元)칭호를 받았다. 막딘찌가 연경에서 고려 사신을 만나 고려에 초청을 받아 개성을 방문하여 자손을 남겼다는 기록이 “대월사기전서”에 있다. 막딘찌는 고려에 4개월 머물렀고 고려 사신의 조카딸과 결혼하여 원나라로 데리고 가서 아들과 딸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귀국하기 전 고려를 다시 방문 처가에 아이들을 맡기고 돌아갔다가 고려를 다시 방문하여 아들 하나를 더 얻어 모두 2남1녀를 낳았다는 것인데, 한국에서는 이에 대한 기록을 아직 찾지를 못하고 있다.
 
베트남에 남긴 한민족 혈연의 흔적
베트남에 있는 한민족 혈연의 뿌리는 20세기에 들어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일제 강점기에 중국으로 이주하였다가 베트남에 정착하였거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에 징용되어 베트남으로 끌려갔다가 일본이 패망하자 돌아올 배편이 없어서 베트남에 정착하게 되어 후손이 생긴 것이고, 또 하나는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 베트남에 진출한 기술자들과 베트남 여인들 사이에서 탄생한 후손들이다. 이들이 소위 ‘라이 다이한’이라고 하는 한국인 혼혈이다. 그래서 베트남은 우리와 혈연적 4촌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제 베트남은 사돈의 나라가 되었다. 최근 한국과 베트남에 약 8만여 가구가 한‧베 다문화가정을 이루고 있어 베트남과 가장 많은 다문화가정을 이루고 있다.
 
한민족과 베트남민족의 시대별 교류 상황
베트남과 약 900여 년의 교류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한국은 혈연적인 교류 외에 중국 연경에서 사신들의 교류가 있었다. 한민족과 베트남민족 사신들의 최초 만남은 1460년 조선의 사신 서거정(徐居正)과 레(黎) 왕조의 양여곡(梁如鵠:Lương Như Hộc)의 만남이다. 그리고 1870년 범희량(笵熙亮:Phạm Hy Lượng) 과 이용숙(李用肅)이 만난 것을 마지막으로 총 16회에 걸친 사신들의 교류가 있었다.

16세기의 교류:빙극관(憑克寬)과 이수광, 금화일사의 만남
16세기에는 베트남 레(黎)왕조의 빙극관(憑克寬)이 1596년과 1597년 조공사절로 명나라 연경을 방문하여 당시 조선의 사신 이수광과 금화일사(金華逸士)를 만나 필담을 나눈 기록이 있다. 이들이 만나 주고받은 39편의 시와 대담, 발(跋), 후(後), 식(識) 등 9편 등 총 48편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 데, 이 들이 주고받은 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古云四海皆兄弟: 예로부터 온 천하가 모두 형제라 했으니,
相濟同舟出共車: 한 배로 강을 건너고, 수레에 함께 오르리라.
 
두 민족의 선조들이 만나 주고받은, “온 천하가 모두 형제”라는 말은 대대로 한국과 베트남의 우호 협력관계 발전의 상징이 되었다.
 
17세기의 교류: 조완벽의 안남(安南) 왕래
진주 출신 선비 조완벽(趙完壁)은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에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 경도(京都)로 잡혀가 왜상(倭商)들에게 강제로 이끌려 1604년(선조 37) 이후 3차례나 안남(安南)에 가서 진기한 사물을 견문하였고, 여송(呂宋:필리핀)과 유구국(琉球國)에도 다녀왔다. 1607년에 회답사(回答使) 여우길(呂祐吉) 등이 일본에 갔을 때, 조완벽이 본국 송환을 간청하여 10년 만에 돌아왔다. 1604년~1606년까지 안남국을 왕래하였던 조완벽은 조선사람이라는 이유로 베트남에서 환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안남국 상선 제주도 표착 사건
광해군일기(1612.3.12.기록)에 의하면 광해군 4년(1611년)에 베트남 상선이 제주에 표착한 일이 있었다. 제주 목사(牧使) 이기빈(李箕賓)과 판관 문희현(文希賢)은 재물이 탐나서 선원과 상인을 술자리로 유인하여 몰살하고 재물을 빼앗고 흔적을 없애려 배는 불살라 수장시킨 일이 있었다. 그리고는 조정에 왜구를 잡았다고 장계를 올려 포상을 받았으나, 나중에 사헌부에 고발되어 모두 귀양을 간 기록이 있다.
 
제주도 주민 24명 호이안 표착 건
조선 숙종(1674~1720) 때 1687년 음력 9월에 제주 목사가 진상하는 말을 배에 싣고 가다가 추자도 앞에서 풍랑을 만나 아전과 제주도 주민 24명이 31일간이나 표류하다가 안남국 호이안(Hội An)에 도착하였는데, 안남국 왕은 이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고 식량을 지원하였다. 1688년 음력 7월에 중국 상선을 타고 귀국한 기록이 숙종실록(1689년 3월 4일 기록)에 있다. 24명의 선원이 태풍으로 안남국에 표착한 뒤 조선으로 돌아갈 배가 마련될 때까지 베트남 조정에서는 거의 1년간이나 숙식을 제공해 준 것이다.
 
18세기의 교류:레꾸이돈과 홍계희, 조영진, 이휘중의 만남
 
베트남 봉건시대의 최고의 학자인 레꾸이돈(黎貴惇:1726~1784)이 1760~1762년에 청나라에 갔다가 1760년 12월 조선의 사신 홍계희(洪启禧), 조영진(趙榮進), 이휘중(李徽中)을 만났다. 조선의 사신은 붓, 한지, 설화지(雪花紙:흰 종이)와 같은 선물로 주고, 시를 지어 서로 주고받았다. 다음은 레꾸이돈이 조선 사신에게 준 한시이다.
 
瀛海東南各一方(영해동남각일방) 영해 동쪽과 남쪽이 각각 일방인데,
齊趨象闕拜天王(제추상관배천왕) 같이 추창하여 상궐로와 천왕께 절했다네.
傘圓概似松山秀(산원개사송산수) 산원은 대개 송산이 빼어난 것을 닮았고,
鴨綠應同珥水長(압록응동이수장) 압록은 이수가 긴 것에 응하여 한가지라.
六籍以來多學問(육적이래다학문) 육적 이래 학문이 많고,
九疇而後更文章(구주이후경문장) 구주 이후 문장이 바뀌었다.
旅懷摺疊如君扇(여회접첩여군선) 나그네가 군의 주신 부채를 접첩하여 품었다가,
新對春風為展揚(신대춘풍위전양) 춘풍을 새로 대할 때 드러내어 펴어 보리라.
판후이익과 황병례, 서호수, 박제가, 이백형의 만남

판후이익(潘輝益)은 레(黎) 왕조, 떠이선(西山) 왕조, 응우옌(阮) 왕조에 이르기까지 세 왕조에서 봉사한 베트남 외교사의 거장이자 대문장가이다. 1788년 농민 혁명을 일으킨 떠이선 왕조의 응우옌후에(Nguyễn Huệ)는 1788년 10월에 침입해 온 청나라 군사를 1789년 1월에 쳐부수고, 이후 복잡한 청나라와의 외교업무를 판후이익에게 맡겼다. 응우옌후에는 1790년 2월 말에 청나라 건륭제의 팔순 잔치에 자신을 대신하여 가짜 왕으로 팜꽁찌(Phạm Công Trị)를 파견하면서 판후이익이 수행하도록 하였다. 판후이익은 응오반서(Ngô Văn Sở) 등 사신단 일행과 함께 가짜 왕을 완벽하게 수행하였다. 이때, 판후이익과 조선의 사신 정사 부마(駙馬) 황병례(黃秉禮), 부사 이조판서 서호수(徐浩修), 서기 박제가(朴齋家), 서상굉문관(書狀宏文館)교리 이백형(李百亨)과 만나 교류하였다. 아래는 판후이익이 조선 사신단에 화답한 시이다.

居邦分界海東南(거방분계해남동), 사는 곳이 바다로 동과 남으로 떨어져 있으나,
共向明堂遠駕驂(공향명당원가참). 멀리서 수레를 타고 명당(明堂)을 향했네.
文獻夙徵吾道在(문헌숙징오도재),문장에 밝고 유학에 밝은이들 여기에 있으니,
柔懷全仰聖恩覃(유회전앙성은담).깊은 성은에 모두가 머리를 조아리네.
同風千古衣冠制(동풍천고의관제), 풍속도 같고 천년 의관도 여전한데,
奇遇連朝指掌談(기우련조지장담). 우연히 조선 사신 손잡고 수일간 담론을 하였네.
騷雅擬追馮李舊(소아의추빙이구),단아한 품격이 옛날의 빙극관과 이수광을 회상케 하니,
交情勝似飲醇甘(교정승사음순감). 교분을 나눔이 향기로운 술맛보다도 좋구나.
 
결론적으로, 한민족과 베트남민족의 교류는 리(李) 왕조의 왕자가 한반도에 정착한 12세기부터 시작되었고, 17세기에 가장 많은 인적 교류가 있었다. 14세기에는 공민왕 때 문익점 선생이 1363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순제(順帝)의 미움을 받아 교지로 3년간 귀양을 갔다가 1367년 2월 귀국길에 교지에서 가지고 온 목화 씨앗이 한반도에 목화재배와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두 민족의 교류는 중국을 매개로 연경에서 사신들이 만나 필담을 나누며 교류하였는데, 1460년부터 1870년까지 총 16회에 걸쳐 교류하였고, 126편의 시와 17편의 글이 전해지고 있다.
 
한‧베 수교 30주년을 맞이하여 교류역사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한국과 베트남과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되어야 바람직한가? 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은 향후 50주년 미래를 준비하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또한, 한국·베트남 관계를 어떻게 Up-Grade 시킬 것인가를 논의하는 것은 미래 세대를 위한 희망의 포석이 될 것이다.
 
한‧베 수교 30년사를 되돌아보면, 베트남은 “과거를 닫고 미래로 향하자(Khép lại quá khứ hướng tới tương lai)”라는 입장으로 미래를 향한 현명한 선택을 하였다. 그러한 대외 정책 기조의 변화가 1992년 12월 22일 한국과 베트남과의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한국과 베트남은 모두 5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민족이다. 장구한 역사에 축적된 문화를 서로 잘 이해하는 것이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승화시켜 나가는 첩경이 될 것이다. 깊은 신뢰와 우호에 기반한 양국 관계는 앞으로도 정치 외교, 국방,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방위적으로 확대되고 심화되어 나갈 것이다. “온 천하가 모두 형제”는 한‧베 두 민족의 선조들이 가꾸어 온 교류의 기본 정신이다. 역사를 돌아보고 그 정신을 오늘에 되살릴 필요가 있다.

 

안경환 필자 주요 이력

▷한국글로벌학교(KGS) 이사장 ▷하노이 명예시민 ▷전 조선대 교수 ▷전 한국베트남학회 회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