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명장 최영, 조선 시대 절개의 상징 성삼문 선생, 청산리 전투에 빛나는 백야 김좌진 장군과 민족대표 만해 한용운 선사, 한국무용을 집대성한 한성준 선생, 한국 근대화단의 거목 고암 이응노 화백에 이르기까지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역사적 인물들을 배출해냈다.
여름방학을 맞은 아이와 함께 천년 역사가 오롯이 스민 홍성으로 갈 채비를 마친다. 교과서로만 보았던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돌아보고, 예술인들의 삶과 작품들을 직접 마주하는 것은 아이뿐 아니라 부모에게도 퍽 의미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투혼의 역사 품은 장군의 땅을 밟다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 칼끝에 찬서리가 고국생각을 돋구누나 /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말인가 / 단장의 아픈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 -<단장지통> 중
장군을 떠올릴 때 항상 함께 떠올리는 전투가 있다. '청산리대첩'이다. 일제강점기에 기록적인 성과를 거둔 전투로 기록된다.
1989년 12월 29일 충남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된 생가터는 1991년부터 성역화 사업이 진행됐다. 이에 따라 생가와 문간채, 사랑채가 복원됐고 백야기념관이 건립됐다.
현재는 안채, 사랑채, 곡간채, 헛간채 등 4채만 복원됐지만 실제는 80칸이 넘는 대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복원된 생가, 그 마당에 발을 들인다. 안채와 사랑채, 광, 우물까지 천천히 훑으며 그의 삶을 가슴에 오롯이 담는다. 평생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광복을 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을 그를 떠올리니 가슴이 저민다.
장군의 헌신과 투혼, 그 영광을 좀 더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다. 백야기념관으로 간다.
1998년 문을 연 백야기념관에서는 장군의 흉상을 비롯해 독립운동의 이모저모를 마주할 수 있다. 특히 청산리대첩 모형이 눈길을 끈다.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청산리 계곡으로 유인한 뒤 초토화하는 장면이 오롯이 담겼다.
장군의 행적을 기리는 사당 백야사로 간다. 이곳에서 장군이 목숨 바쳐 지킨 독립운동의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떠나간 님의 일생과 마주하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님의 침묵> 중
이제 승려이자 시인이요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생 생가지로 발길을 옮긴다. 김좌진 장군 생가지와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1905년 백담사에서 득도한 만해는 1919년 삼일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으로 활동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한 그는 불교 대중화, 독립사상 고취, 문학 활동을 펼치다 1944년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먼저 만해문학체험관(매주 월요일 휴관)으로 간다. 입구에서 그의 동상과 초상화를 마주한 후 실내 전시실로 들어간다.
이곳에는 만해의 문학과 철학을 반영하는 유물 60여 점이 보관돼 있다.
서당에서 공부하던 유천(만해의 아호)의 모습과 서당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모습, 글 읽기에 정신이 팔린 모습, 만주에서 마취 없이 총탄 제거 수술을 받는 모습, 딸 영숙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모습 등이 오롯이 재현된 만해의 일생이 큰 울림을 선사한다.
그러다 시선이 어느 한 곳을 향한다. 그리고 발걸음을 멈춘다. 설악산 오세암에서 〈님의 침묵〉을 집필하는 장면을 재현한 방이다.
12폭 병풍을 뒤에 두르고 단정하게 앉아 호롱불에 의지한 채 붓으로 〈님의 침묵〉을 써 내려가는 선생의 모습을 마주하니 억눌렸던 감정이 폭발한다. 만해가 그린 '님'의 존재가 조국, 민족,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슬픔이 더 크다.
심호흡을 깊게 하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리고 만해 선생 생가로 발걸음을 옮긴다. 슬쩍 방 안을 들여다본다. 만해의 영정과 앉은뱅이책상 하나가 퍽 처연해 보인다.
생가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그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 '만해사'가 있다. 이곳에서 다시금 옷깃을 여미고 예를 갖춰 묵념한다.
◆예술혼 실린 연꽃 향을 맡다
'수양버들이 늘어진 사이로 옛집의 기역자 모습이 보이고' -<우짖는 솔바람/시원한 내 고장 충남 덕숭산> 중
근현대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겪은 현대 화가 '고암 이응노' 선생도 홍성 출생이다.
1904년 홍성에서 태어나 열일곱 나이에 상경해 일본 도쿄에서, 다시 서울에서, 또 프랑스 파리에서 예술혼을 불태웠다. 1960년대에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그는 다시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타국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의 삶 속엔 그림만이 가득했다. 그가 남긴 작품 3만여 점이 이를 대변한다. 전통 서화부터 현대의 추상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고 다양한 작품을 마주할 수 있다.
그가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생활하던 생가터는 오늘날 기념관으로 탈바꿈해 관람객을 맞고 있다. 생전 고암이 그림의 꿈을 품었던 공간은 그의 예술적 삶과 무척 닮았다.
20세기를 치열하게 살고 간 한 예술가, 한 인간의 삶과 정신을 마주하러 길을 나선다.
기념관은 생가를 비롯해 전시동과 부속동(자료실, 북카페), 연지공원과 야외전시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는 그의 유품과 작품 863점이 소장돼 있다.
기념관만 둘러보고 가려는데 어디선가 은은한 향내가 코끝을 자극한다. 향기를 따라 천천히 걸으니 넓은 연못 안에서 바람에 일렁이는 연꽃 무리가 고귀한 자태를 드러낸다.
연꽃 향이 이토록 그윽했던가. 커다란 연잎 위로 유백색의 연꽃이 꽃망울을 터트리는 모습은 어찌나 청초한지···. 꽃의 자태에 반하고 향기에 취한다. 삶을 예술로 불태웠지만 끝내 고향으로 오지 못한 그의 슬픔이 연꽃 향기로 남은 듯해 오랫동안 자리를 뜨지 못한다. 폐부 깊은 곳까지 그의 예술혼을 담고 나서야 발걸음을 옮긴다.
기록적인 폭염에 피서(避暑)가 절실한 이때, 홍성의 위인들을 마주하며 삶에 위안을 받는다. 고난의 역사를 감내한 위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얻은 '진한 감동'이 그 어떤 선물보다도 값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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