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고지에서 퍼터 만드는 법 배운 스카티 캐머런, 메이저 대회서 비상(飛翔)
스카티 캐머런은 어린 시절 차고에서 아버지와 퍼터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인 1991년부터다. 그는 그때부터 맥스플라이, 레이쿡, 클리블랜드, 미즈노 등과 협력했다. 캐머런과 그의 아내가 캐머런 골프 인터내셔널을 설립한 것은 1992년 말이다. 첫 작품은 스카티 캐머런 클래식 퍼터 라인.전 세계에 이름이 알려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93년 4월 남자골프 4대 메이저 대회인 마스터스 토너먼트에서다. 독일 병정이라 불리는 베른하르트 랑거가 캐머런 프로토타입 퍼터로 우승했는데, 이 승리가 캐머런 회사에 날개를 달아줬다.
아쿠쉬네트컴퍼니가 캐머런에게 접근한 것은 1994년 8월. 다른 5개 회사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며 계약을 맺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상표 '스카티 캐머런'이다. 이는 아쿠쉬네트컴퍼니 주력 상표로 성장했다. 다른 상표로는 타이틀리스트, 풋조이(FJ), 보키 웨지 등이 있다. 스카티 캐머런 로고는 7점 왕관이다. 왕관 위에 점 7개를 찍었다.
캐머런의 스튜디오는 1996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노스카운티에 처음 만들어졌다. 세계적인 선수들이 이곳에서 퍼팅 스트로크를 분석하고, 맞춤형 퍼터를 보유했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메이저 대회에서 스카티 캐머런을 들고나오기 시작한 것은 1997년이다. 마스터스 우승으로 주목받았다. 이 중 14승이 스카티 캐머런과 함께했다.
우즈는 7년(2010~2016년)간 나이키 퍼터를 사용했다. 계약 때문이다. 나이키가 용품 사업에서 철수하자, 우승을 함께한 스카티 캐머런 퍼터를 다시 캐디백에 넣었다.
우즈의 메이저 우승처럼 스카티 캐머런도 승승장구했다. 2004년에는 스튜디오를 확장했다. 2007년에는 일본 도쿄에 박물관과 갤러리가 문을 열었다.
아쿠쉬네트컴퍼니가 필라 코리아에 인수된 것은 2011년 5월이다. 매각 금액은 12억2500만 달러(한화 약 1조5000억원). 큰 거래에도 캐머런은 살아남았다.
캐머런이 처음 디자인한 퍼터는 X다. 오거스타 내셔널에서 랑거를 우승으로 이끈 퍼터는 베른하르트 랑거 클래식 1, 우즈에게 메이저 첫 우승을 선사한 퍼터는 텔3 뉴포트다. 레이쿡 블루 구즈도 빼놓을 수 없다. 꾸준하게 우즈 메이저 승수를 채운 퍼터는 뉴포트2 GSS다. 이외에도 수많은 퍼터가 있다. 써클티, 투어랫, 슈퍼랫 등 분류도 다양하다.
퍼터 광고 보고 뛰어든 베티나르디, 캐머런 품에서 벗어나 자립(自立)
베티나르디 골프를 설립한 사람은 로버트 베티나르디다. 베티나르디는 1991년 한 골프 매장 광고를 보고 업계에 뛰어들었다. 해당 광고는 밀링 머신 가공 퍼터. 당시 베티나르디는 컴퓨터수치제어(CNC) 기계를 갖춘 자체 제조 시설을 소유하고 있었다. 베티나르디는 캘러웨이에 전화를 걸었다. 퍼터 디자이너와 일을 하기 시작했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다.1993년부터 1998년까지는 캐머런과 함께 일했다. 이 기간 모든 퍼터는 베티나르디의 공장에서 만들어졌고, 캐머런이 마무리했다.
1998년, 자신의 이름으로 회사와 퍼터를 만들면서 캐머런 품에서 벗어난 베티나르디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벤 호건 골프, 2005년부터 2008년까지 미즈노 골프와 협력했다. 계약이 종료되면 다시 자신의 상표로 돌아왔다.
베티나르디가 만든 퍼터로 첫 우승을 거둔 선수는 괴짜 골퍼로 유명한 예스퍼 파네빅이다. 1999년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그레이터 그린즈버러 오픈에서 우승했다.
이후 수많은 우승자를 배출했다. 필 미컬슨, 루크 도널드, 매트 쿠쳐, 짐 퓨릭, 비제이 싱, 매트 피츠패트릭 등이다.
스카티 캐머런이 마스터스로 떠올랐다면 베티나르디는 그 외 메이저로 떠올랐다. 첫 메이저 우승은 2003년 US 오픈이다. 퓨릭이 우승컵을 들었다. 2004년 PGA 챔피언십에서는 싱, 2018년 디 오픈 챔피언십에서는 프란체스코 몰리나리, 2022년 US 오픈에서는 피츠패트릭이다.
가장 최근 우승 기록자도 피츠패트릭이다. PGA 투어 RBC 헤리티지에서 베티나르디를 쥐고 우승했다.
베티나르디는 3가지 라인업이 있다. BB, INOVAI, QUEEN B다. BB는 클래식, INOVAI는 현대, QUEEN B는 여성을 위한 라인업이다.
2018년 미국프로풋볼(NFL) 팀인 필라델피아 이글스는 슈퍼볼 우승을 기념해 베티나르디에게 우승 퍼터를 요청했다. 그때 만들어진 것이 점수(41-33)를 새긴 한정판 블레이드 퍼터 BB1이다.
게린 라이프, 이븐롤 주무르는 '천재(天才) 퍼터 메이커'
미국 사람들은 퍼터 메이커 게린 라이프를 지니어스(Genius·천재)라고 부른다. 다른 메이커보다 창의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퍼터 메이커가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라이프의 첫 직업은 아트 디렉터였다. 1970년대 라이프는 광고 업계에 종사하는 신입사원이었다. 퍼터를 주무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글 쓰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디즈니와 협업하면서 창의적인 생각이 샘솟기 시작했다.
생각들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였고 이를 해소할 사람을 만나게 됐다. 바로 유명 교습가인 데이비드 레드베트다. 라이프는 운 좋게 레드베트의 도구 개발을 도왔다.
그는 이 계기로 캐비티 말렛 퍼터를 세상에 선보였다. 당시에는 신선했지만, 이제는 당연한 분류가 됐다. 특허 생각도 없었다. 덕분에 여기저기서 만들었다.
라이프는 90년대 퍼터 페이스 홈(그루브)에 관심을 가졌다. 지속적인 실험이 만들어 낸 결과다. 1996년 퍼터 그루브에 대한 특허를 취득했다. 라이프 퍼터를 설립한 것은 2000년부터다. 라이프만의 롤(구름)로 그린 위를 정복해 나갔다. 퍼터와 공이 만나는 순간 적은 바운드로 최대한 빠르고 부드럽게 뻗어 나갔다.
좋은 퍼터라는 입소문은 선수들에게 전해졌다. 투 볼 퍼터로 유명할 때는 투 바 퍼터를 내놨다. 투 바 퍼터는 PGA 투어 챔피언스(시니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투어 내 30~40명이 투 바 퍼터를 썼다.
2007년까지 승승장구하던 라이프 퍼터는 2008년 추락하기 시작했다. 경제 붕괴로 인해 회사를 매각해야 했다.
이후 라이프는 이븐롤을 만나게 된다. 이븐롤은 똑같이 구른다는 뜻이다. 퍼터 어느 부분에 맞아도 일정한 거리를 낸다. 라이프가 25년간 공들인 그루브 기술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타사 퍼터는 힐과 토에 공이 맞으면 거리가 줄고, 정확성이 떨어진다.
처음 상표를 공개한 것은 2016년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열린 PGA 머천다이즈 쇼였다. ER 시리즈를 시작으로 ERv 시리즈도 선보였다. 2017년에는 마이골프스파이, 골프다이제스트에서 최고의 퍼터로 선정됐다.
지난해 말 방한한 그는 본지와 만나 "개척 정신으로 가짜가 아닌 진짜를 만든다. 창의적인 제품을 내놓으면 사람들이 그런 걸 왜 만드냐고 물었다. 비난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나를 따라 하기 바쁘다. 타사처럼 마케팅이 아닌 퍼터 디자인에 집중하는 편이다.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을 할 계획이다. 단 하나의 결점도 없는 완벽한 퍼터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3대 퍼터 메이커 중 한 명인 그는 내달 초 한국을 방문한다. 두 번째 방한이다. 1년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다. 한국 기업 크리에이츠가 이븐롤 대주주가 된 것이다. 인수 이후에도 라이프는 이븐롤을 디자인한다. 이븐롤 쪽 관계자는 "라이프에게는 마음 편하게 창의적인 디자인을 할 수 있는 계기다. 더 좋은 제품이 탄생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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