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미세화 공정이 물리적 한계에 직면함에 따라 많은 글로벌 반도체 기업이 소재 혁신으로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유리기판'(글라스 기판, Glass Substrate)을 꼽을 수 있다. 엔비디아, 애플, 브로드컴, AMD, 인텔 등 주요 팹리스는 자사 최선단 반도체에 유리기판을 적용하기 위한 연구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고 SKC(앱솔릭스), 삼성전기, LG이노텍 등 국내 반도체 소재 기업도 유리기판을 조기 양산하기 위해 회사 모든 역량을 결집하고 있다. 이에 2025년은 유리기판 상용화 원년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유리기판은 기존 플라스틱 기판(PCB, 인쇄회로기판)을 대체할 것으로 기대받는 꿈의 반도체 소재다. PCB는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처리장치(GPU), 데이터저장장치(메모리) 등 성질이 다른 반도체가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하는 중간 매개체다. 이 중간 통로의 소재를 플라스틱에서 유리로 바꿈으로써 발열을 낮추면서 데이터 전송속도를 끌어올리려는 게 유리기판 산업의 최종적인 목표다. 유리기판은 플라스틱 기판보다 표면이 매끈해 회로 왜곡을 줄일 수 있고 열로 인해 기판이 휘는 현상도 드문 장점이 있다.
기존 첨단 패키징 과정에서 처리장치(GPU)와 메모리(HBM)를 결합하려면 중간기판이 반드시 필요하다. 중간기판은 양산 비용이 저렴하지만 기판이 잘 휘고 칩을 작게 만드는 데 어려움이 따르는 유기 중간기판과 내구도·성능이 우수하지만 양산 비용이 비싼 실리콘 중간기판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 TSMC의 첨단 패키징 생산능력(캐파)에도 한계가 있어서 엔비디아, 애플 등 글로벌 팹리스는 돈을 내고도 제때 AI·모바일칩을 만족스럽게 공급받지 못하는 문제에 직면해야만 했다. '슈퍼 을' TSMC에 반도체 생산으로 전적으로 기대고 있는 글로벌 팹리스의 한계다.
이에 글로벌 팹리스는 중간기판 없이 첨단 패키징이 가능한 유리기판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소재 혁신에 속도를 내고 있다. 유리기판은 미세화에 한계가 있는 기존 플라스틱 기판과 달리 유기·실리콘 중간기판처럼 기판에 직접 미세회로를 새길 수 있어 중간기판 없이 첨단 패키징을 진행할 수 있다. 중간기판이 없어지는 만큼 반도체 두께도 25%가량 얇게 만들 수 있어 열 배출에도 유리하다.
실제로 엔비디아는 최근 SKC·앱솔릭스가 양산하는 유리기판의 샘플을 공급받아 자사 반도체에 적용할 방안을 찾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5 현장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SK그룹 부스를 둘러보던 중 SKC·앱솔릭스 유리기판을 들고는 "방금 팔고 왔다"고 웃으며 말했다. 최 회장이 어떤 기업에 유리기판을 판매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그가 이날 오전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회동한 점을 고려하면 엔비디아에 유리기판을 공급했다고 직접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엔비디아는 TSMC 코워스(CoWoS) 공정에 기대고 있던 첨단 패키징에 SKC·앱솔릭스 유리기판 소재를 도입함으로써 생성 AI의 두뇌 역할을 하는 데이터센터 GPU칩의 생산량을 확대하면서 대TSMC 협상력을 강화하려는 행보로 분석된다. 대만 공급망에 따르면 애플도 한국 반도체 소재 업체(삼성전기로 추측)와 협력해 자사 최신 모바일 칩에 유리기판을 도입하는 것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김성진 앱솔릭스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유리기판을 적용하면 칩 구조가 간단해지고 실리콘 중간기판을 개발하기 위해 일부 파운드리에 의존할 필요도 없어진다"며 "2007년 출시된 스마트폰이 모바일 시장을 연 것처럼 유리기판이 AI 산업을 바꾸는 궁극적인 플랫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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