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왕휘 아주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국에 대한 양보를 시사하는 정부 고위관계자의 발언이 이어지면서, 협상이 졸속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가지도 전에 양보를 언급하게 되면, 우리나라는 협상 과정에서 수세적 위치를 탈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협상 의제는 물론 협상 전략에 대한 꼼꼼한 점검이 필요하다.
미국이 제기한 협상 의제는 트럼프 대통령과 한덕수 권한대행의 4월 9일 통화에서 드러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트루스 소셜 계정에 대미 무역흑자, 관세, 조선, 미국산 LNG 수입, 알래스카 파이프라인 합작투자, 방위비 분담금 등을 논의했다고 게시하였다. 국무조정실 보도자료에는 한미동맹 강화, 무역균형 등 경제협력, 북핵 문제 등을 적시되었다.
의제가 많기 때문에 협상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의제부터 논의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한덕수 권한대행은 지난 14일 4차 경제안보전략태스크포스 회의에서 “하루 이틀 사이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 관련 한·미 간 화상 회의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발언하였다. 15일에는 최남호 산업통상자원부 2차관이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가 한국의 대미 관세 협상 패키지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한다”며, “자동차(관세 협상에서) 큰 혜택을 받을 수 있다면(알래스카 LNG 프로젝트 참여는) 양보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언급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러한 발언들을 종합해보면, 상호관세를 낮추는 협상 수단으로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 참여가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익성이 확보되지 않아 미국기업도 투자하지 않은 프로젝트에 우리 기업의 참여를 강요하는 방식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재정 지원을 제공한다면, 수익은 민간에, 손실은 정부에 집중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이런 투자 전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엄밀한 비용편익 분석이 필수적이다.
협상 방식도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문제다. 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협상의제를 한꺼번에 결정하는 일괄타결 또는 원스톱 쇼핑을 선호한다. 최상목 부총리가 현재 협상 의제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발언했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방위비 분담금 증액은 물론 주한미군 감축을 언제든지 위협할 수도 있다. 경제적 이익과 안보적 고려가 충돌할 때 어느 것을 더 중시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즉 관세 인하를 위해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수용하든지 아니면 방위비 분담금의 동결을 위해 관세 인하를 포기해야 한다.
북한 핵무기에 대한 억지력을 강화하기 위해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는 대가로 핵잠재력, 핵연료 재처리, 핵잠수함 등을 확보하자는 주장도 있다. 우리 정부의 설득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 에너지부가 민감국가 지정 조치를 해제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이 관세 협상에서 핵 문제의 거론을 용인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현재 대미 협상을 전담하는 산업통상자원부와 통상교섭본부는 이러한 경제안보 연계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이 없다. 따라서 경제안보전략 TF 회의에 참석하는 국가안보실장이 명확한 지침을 제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우리나라와 유사한 처지에 있는 국가들의 협상 과정도 면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미국이 먼저 협상하는 국가에 특혜를 제공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나중에 협상하는 국가들에 경고하기 위해 최대한 양보를 압박할 수도 있다. 현재 미국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으므로 원숭이가 보는 앞에서 닭의 모가지를 자르는 살계경후(殺鷄儆猴)에 대비해야 한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협상대표인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에게 협상을 조속히 마무리하기 위해 무리한 양보는 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협상에서 합의가 번복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방이 수세에 있다고 판단할 때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하는 거래의 기술에 매우 능하다. 2012년 발표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가 트럼프 행정부의 요청으로 2019년 개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비관세 무역장벽을 통해 미국 자동차 수입을 제한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물론 우리나라의 대미 관세가 미국의 대한 관세보다 네 배가 높다는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하였다. 이런 인식이 변화하지 않는 한, 트럼프 대통령은 합의를 언제든지 무시하고 제재를 부과할 수 있다. 따라서 트럼프 행정부 임기 내 미국이 먼저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안전장치가 합의문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고려해야 할 사안은 협상 타결 시점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앞으로 50일 뒤에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다. 만약 그 전에 협상이 타결된다면, 협상을 진행한 정부와 합의사항을 이행하는 정부가 달라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차기 정부가 한덕수 권한대행의 협상 결과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면, 한미 관계는 물론 국내 정치에서도 심각한 갈등이 초래될 것이다. 이런 문제를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국회와 공조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여당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정부는 국회와 협의를 통해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
이왕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외교학과 ▷런던정경대(LSE) 박사 ▷아주통일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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