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광석 한국경제산업연구원 경제연구실장]
역사는 되풀이된다. 패권전쟁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21세기 후반 일본은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듯 미국 경제를 바짝 추격했다. 1980~1990년대 세계 GDP 2위 국가인 일본은 1위 국가인 미국의 GDP 규모를 최대 72.6%까지 치고 올라갔다. 특히 일본의 자동차 산업에 밀려 수많은 미국 노동자들이 일본 차량을 부수며 시위를 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은 막대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 상황에 노출되었으며, 이는 레이건 정부의 쌍둥이 적자(twin deficts)라 불리는 유명한 역사로 기록되었다.

미국과 일본의 GDP 추이 [사진=IMF]
1985년 플라자 합의
미국 정부는 플라자 합의(Plaza Accord)를 이끌었다. 당시 의회는 무역보호법를 통과시키고, 일본 등 교역상대국에 통상 압력을 가했다. 세계 주요국들은 미국의 규제에 굴복했다. 1985년 9월 22일 미국 뉴욕의 플라자호텔에서 미국, 일본, 독일(서독), 영국, 프랑스 재무장관들이 모였고, 환율시장에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고평가를 유도했고, 미국 달러화를 평가절하시켰다. 이후 1987년 루브르 합의(Louvre Accord)를 통해 달러화의 가치 하락을 막는 등 환율시장에 개입하는 통화전쟁이 이어졌다.

20세기 후반 미국의 무역구조 [사진=BEA(Bureau of Economic Analysis)]
2025년 ‘제2의 플라자 합의’, 마러라고 협정(Mar-a-Lago Accord)
30년이 지난 지금 ‘제2의 플라자 합의’가 설계되었다. 그 설계도는 스티븐 미란(Stephen Miran)이 트럼프 미 대통령이 당선된 2024년 11월 발표한 'A Users Guide to Restructuring the Global Trading System'라는 보고서다. 직역하면 ‘글로벌 무역시스템 재구성 사용자 가이드’지만 미란 보고서로 통한다.
미란 보고서는 관세 등을 활용해 세계 주요국에 달러 약세에 강제로 합의를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을 골자로 하고 있다. 스티븐 미란은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다. 2025년 트럼프 행정부가 상호관세를 발표하고 주요국들과 협정을 추진하는 행보들이 그의 구상대로 전개되고 있음을 확인케 해준다. 21세기 들어 중국의 폭발적인 성장은 미국과의 격차를 상당 부분 축소시켜왔고, 중국의 GDP는 미국의 76.8%(2021년)에 이르기까지 한다. 전기차, 배터리, 신재생에너지뿐만 아니라 반도체, AI 등과 같은 미래 산업에서 미국을 이미 추월했거나 바짝 추격하고 있다. 제2의 플라자 합의를 계획할 만하다. 미국 증권가들 사이에 이런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마러라고 협정’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세계 주요국의 GDP 추이 및 전망 [사진=IMF]
마러라고는 트럼프 소유의 회원 전용 호화 리조트다. 미국 남동쪽 플로리다주의 팜비치(Palm Beach)라는 세계적인 휴양도시에 위치한다. ‘마러라고(Mar-a-Lago)’라는 명칭은 ‘바다에서 호수까지’라는 뜻의 스페인어다. 트럼프는 이곳에 수시로 가고 있고, 많은 인사들을 만나고 있어 사저 별장이자 ‘제2의 백악관’으로 불리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이곳에서 제2의 플라자 합의를 구상하고, 세계 주요 인사들과 만나면서 달러 약세 합의를 종용할 것이라는 음모론이 확산하고 있다.
트리핀 딜레마(Triffin Dilemma)와 통화협정 시나리오
트리핀 딜레마는 기축통화국이 여러 장점도 가지고 있지만 경제·안보적으로 상당한 위협을 주는 등 구조적 모순이 있음을 의미하는 용어다. 1960년대 로버트 트리핀(Robert Triffin) 예일대 교수가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하는 현행 국제금융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을 설명한 것이 발단이다. 미국이 기축통화를 발행함으로써 차입 비용을 낮추고, 전 세계 금융 지배력을 갖는 장점이 있는 반면 달러를 과대평가하게 만들어 무역적자와 재정적자가 늘어나 미국 실물경제에 부담을 준다는 뜻이다. 세계 주요국들이 외환보유액의 형태로 달러를 가지고 있으니 달러 강세를 유인하고 미국은 무역적자, 제조업 위축, 고용 감소로 이어져 재정적자도 늘어나게 된다. 기축통화국은 유동성 공급과 국제 비축자산의 기능을 제공해 주면서 경쟁국에 의존하게 되고 방위 및 무기제조 공급망도 흔들려 국가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
2025년 미국은 트리핀 딜레마라는 숙제를 풀기 위한 통화협정의 여정하에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가능한 통화협정 방식은 크게 두 가지 접근이 있다. 첫째, 다자간 접근(Multilateral Currency Approaches)이다. 1985년 플라자 합의와 유사한 방법으로 외환 개입 및 국제정책 공조를 통해 달러 약세화를 유도할 수 있다. 둘째, 일방적 접근(Unilateral Currency Approaches)도 가능하다.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적용해 외환보유액 ‘사용료(1~2%)’ 부과를 요구하거나 ‘금 보유법(Gold Reserve Act of 1934)’을 활용해 금 비축 규모를 축소하고 외채를 매입할 수도 있다.
트리핀 딜레마를 떠나서도 트럼프 행정부는 달러약세를 유도할 것으로 전망한다. 다국적 기업들이 미국에 제조기지를 옮기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는 즉, 소비국가에서 제조국가로의 전환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고, 수입업자가 유리한 환경보다 수출업자가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 필요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는 무역 적자국이었기 때문에 달러 강세를 유도해 구매력을 높이는 것이 유리한 정책이었을지 모르지만 무역 흑자국으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그 구매력을 상대국에 제공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특히 다국적 기업들은 더욱 환율에 민감하게 국가별 생산량을 조절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한국과 미국 양쪽에 공장을 두고 있는 경우 달러 강세일 때 한국에서 가동률을 높이고, 달러 약세일 때는 미국에서 가동률을 높일 것이다. 미국 내 제조기지 이전과 생산 가동률을 높여 고용 창출 및 경제 선순환을 유도할 큰 그림을 가진 트럼프 행정부는 달러 약세를 유도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통화협정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관세나 안보를 도구로 상대국에 강요할 가능성이 높다. 관세 부과를 발표 또는 발효한 후 협정에 응해주는 국가들에 관세를 면해주는 방식이다. 한국과 무역협의하는 과정에서도 환율을 논의 테이블에 올린 바 있다. 2025년 4월 최상목 경제부총리는 “스콧 베선트 장관이 재무부 간에 별도로 환율을 논의하자고 먼저 얘기했다”고 밝힌 바 있다. 2025년 5월 영국과의 첫 번째 무역협상을 발표하면서 트럼프는 “이 협정에는 영국이 미국과 경제 안보 협력체제(economic security alignment)에 편입되는 계획이 포함돼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마러라고 협정’의 영향과 대응전략
외환시장에서는 미국이 ‘마러라고 협정’을 끌어낼 것을 상정하고 있는 모습이다. 미국이 환율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외환개입을 경고할 수 있다. 또한 미국 국채나 기타 외채금리가 불안정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특정 국가들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외환시장의 변동성이 증폭될 수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달러 약세가 진전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변동성이 높은 외환시장에 2차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하겠다. 정부는 원자재나 부품의 수입을 담당하는 영세 공급업체들이 환위험에 직면하지 않도록 외환시장을 모니터링하고 적절한 수급 계획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기업들은 장기적인 외환시장의 전망을 기초로 여유 있게 수급을 관리할 필요가 있고, 일시적인 달러 강세가 나타날 때 그 구간을 피해 수입 계약을 체결할 것을 추천한다. 개인들은 미국 증권시장에 대한 투자 등을 고려할 때 달러 약세화로 인해 수익률이 상쇄될 수 있음을 주지해야 하겠다.
김광석 필자 주요 이력
△한양대 겸임교수 △전 삼정KPM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 △전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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