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진석 KODA(코다) 대표
한국에서는 그동안 가상자산을 투기의 영역으로 간주해 산업 육성보다는 규제 위주로 대응해 왔다. 2017년 정부 합동 발표 이후 사실상 '창구지도' 방식으로 법인 계좌 발급이 제한되면서 개인 위주로 시장이 형성됐다. 국내 가상자산 관련 사업 전반이 위축된 배경이다. 그러나 글로벌 주요국의 제도적 변화에 따라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자 이를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금융당국은 올해부터 단계적으로 법인 가상자산 계좌 발급을 허용하겠다는 발표를 내놓았다.
글로벌 가상자산 시장에서는 법인이 전체 거래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법인 위주의 참여는 △정보 비대칭 해소 △검증된 프로젝트 투자 △안정적인 유동성 공급 등을 가능하게 한다. 반면 국내 시장은 작년 7월 시행된 '가상자산이용자 보호법'으로 어느 정도 완화됐지만 100% 개인 간 거래로만 형성돼 시세 조종, 이른바 '펌핑'이나 리딩방을 통한 과도한 시세 변동 등 불공정 거래에 노출돼 있었다.
국내 법인 투자가 본격화하면 알트코인 위주의 투자가 메이저 코인 위주로 전환되고, 시세 조종 세력에 의한 급등락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법인의 중장기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투자가 시장에 안정을 가져오고, 정보 비대칭이 해소돼 개인 투자자에게도 더 건전한 투자 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금융당국은 법인이 가상자산을 보유할 경우 제3의 가상자산 보관기관(커스터디)을 활용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이는 도산절연을 보장하고, 회계감사 등 법인이 요구하는 관리·통제 기능을 충족하기 위함이다. 현재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가 파산할 경우 원화 예수금은 가상자산이용자 보호법에 따라 보호받을 수 있지만 고객의 가상자산은 거래소의 채권·채무 관계에서 우선 변제되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 이는 대규모 자금을 투자하는 법인에 매우 큰 리스크가 될 수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이미 법인들이 자체적으로 핫월렛·콜드월렛 등을 구축하기보다는 커스터디 사업자에게 보관을 맡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커스터디는 해킹 위험, 내부 통제, 회계감사 요건 등을 종합적으로 충족해 주기 때문이다. 이 산업은 가상자산 생태계의 핵심 인프라로 인정받고 있으며 법인 시장이 커질수록 그 중요성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한국도 하반기부터 법인 시장이 본격적으로 확대되면 커스터디 사업자의 역할이 크게 주목받을 것이다. 이에 따라 신탁 기관에 준하는 자본금·보험·인력·물적 요건을 갖춰야 하며 과감한 투자와 인프라 확충이 필요하다.
이미 해외에서는 결제, 보관, 투자 운영, 레그테크(RegTech), 탈중앙화금융(DeFi) 등 다양한 분야에서 유니콘 기업이 다수 탄생하고 있다. 가상자산을 미래 신사업으로 인식하고 제도화와 정책 지원에 적극 나선 결과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몇 개의 가상자산 거래소를 제외하면 눈에 띄는 성과를 내는 기업이 거의 없다. 법적·제도적 환경 제약으로 대규모 투자 유치나 혁신 서비스 개발이 쉽지 않았던 탓이다.
건전한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서 금융당국의 가이드라인이 중요하다. 현재 금융위원회 법인계좌 TF에서 준비 중인 법인 가상자산 보유 관련 회계·세무·자금세탁방지(AML) 가이드가 그 예시다. 아울러 커스터디 사업자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자본금과 보험 요건을 제시해 투자를 촉진하고 기술 개발을 지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국내 가상자산 산업은 본격적인 '법인시장 시대'를 앞두고 있다. 이는 가상자산 투자를 넘어 결제·보관·운용 인프라 등 전방위 산업 생태계로 확장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글로벌 흐름에 맞춰 육성해야 한국도 미래 금융혁신을 주도하고 새로운 유니콘 기업을 탄생시킬 수 있다. 이번 법인 계좌 허용 조치가 가상자산 산업의 질적 성장을 이끄는 촉매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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