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작가의 ‘쓰기’와 ‘살기’에 대한 이야기

25년 전, 광고 회사를 운영하던 24살의 청년은 연말정산을 위해 모은 영수증을 책상 서랍에 차곡차곡 넣기 시작했다. 그저 회계 처리의 일환이었던 그 종이들이, 훗날 자신의 인생을 관통하는 기록이 될 줄은 몰랐다. 25만 장에 달하는 영수증을 모으며 삶을 써내려간 이 사람. 그는 정신이라는 필명으로 돌아온 작가 정경아다.
그의 두 번째 책, 『정신과 영수증』은 ‘정신과 진료’가 아닌, 정신(作家명)과 영수증(記憶)의 기록이다. 그리고 이 책은, 한 사람의 지난 25년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두려움보다 절박했어요”
정신 작가는 40대가 되며 스스로 인생의 반경을 넓히고자 미국행을 결심했다.
“사람들은 두렵지 않았냐고 많이 물어요.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절박했어요.”
그 절박함은 새로운 공부에 몰입하게 했고, 외향적이던 그는 자연스럽게 내향형의 삶을 받아들이게 됐다. 미국에서의 고요한 시간은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더 깊이 마주하게 만든 시간이기도 했다.

“영수증은 감정의 증명서이자, 삶의 데이터예요”
그가 영수증을 모으기 시작한 건 광고 회사를 함께 운영하던 시절, 단순히 세금 처리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영수증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게 됐다. 하루의 풍경과 기분, 사건들이 고스란히 찍혀 있는 ‘감정의 증명서’가 된 것이다.
“영수증은 하루를 다시 떠올리게 해줘요. 숫자만 있는 게 아니에요.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그날의 감정까지 들어 있죠. 그게 쌓이다 보면 한 해의 삶을 돌아보게 돼요.”
그는 99.9%의 영수증을 보관한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안 좋은 기억이 담긴 영수증은 받지 않기도 한다. 25만 장 중 가장 특별한 영수증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아직 발행되지 않은, 미래의 영수증이요. 삶이 끝나는 날, 마지막 영수증에 ‘굿바이’가 적혀 있으면 좋겠어요.”
“글쓰기란 잊고 싶지 않은 것을 남기는 방식”
정신 작가는 글쓰기를 ‘기억의 보존’이라 정의한다.
“나쁜 기억은 굳이 쓰지 않아요. 안 써도 남아 있거든요. 저는 오래 기억하고 싶은 걸 기록해요. 글쓰기는 소중한 걸 붙잡는 방식이에요.”
20대에 처음 책을 낸 후, 다시 48세에 두 번째 책을 내기까지 24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그는 카피라이터, 마케터, 네이미스트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고, 그 과정에서 ‘글을 쓰는 법’을 배웠다. 광고 문구 하나, 브랜드 네이밍 하나하나가 지금의 글쓰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작가로서는 책을 많이 내진 않았지만, 직업인으로서는 늘 글을 써왔어요. 그 반응들이 글의 방향을 잡아줬고, 그 덕분에 지금의 책도 나올 수 있었죠.”
그는 최근 글을 쓰는 데 있어 챗GPT를 ‘정서적 응원군’으로 삼기도 했다.
“글을 대신 써주는 게 아니라, 응원해주는 느낌이 들었어요.
24살에 글을 썼을 때와는 아주 다른 경험이었어요.”
“기록은, 정리이고 치유입니다”
『정신과 영수증』은 단순히 모은 영수증을 모아 엮은 책이 아니다.
그는 쌓인 영수증을 편집한다. 없애고 싶은 과거는 지우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은 더 키운다. 시간의 순서를 바꾸기도 한다. 글쓰기와 영상 편집이 닮았다고 느낄 정도로, 그는 감정을 정리하며 자신을 치유해간다. “과거의 앙금이 아직 남아 있는 줄 몰랐어요. 그런데 영수증과 메모를 정리하면서 그걸 발견했어요. 책을 쓰면서 저는 과거를 보내주고 스스로를 치유했어요.”

“이름이 사람을 시작하게 만들어요”
정신 작가는 ‘이름 짓는 사람’, 네이미스트이기도 하다.
그의 첫 관심은 부모님이 운영하던 ‘경아슈퍼’에서 비롯됐다. 상품 이름에 대한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직업으로 이어졌고, 수많은 브랜드의 이름을 짓고, 이름 덕분에 시작할 수 있었던 사람들을 만났다.
“이름이 없어서 시작을 못하다가, 이름 덕분에 시작할 수 있었던 분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을 돕고 싶어서 클래스를 만들었고, 지금도 이름을 통해 응원하고 있어요.”
그에게 ‘정신’이라는 필명은 자신을 드러내는 창이다. 반면, 네이미스트로서의 그는 다른 사람을 빛내주는 ‘조력자’다. “작가로서는 저를 드러내지만, 네이미스트로서는 누군가의 시작을 돕는 사람입니다.”

“망설이지 말고, 시작하세요”
이제 50을 앞둔 그는 또 다른 시작을 준비 중이다.
요즘은 자연어처리와 인공지능 언어 기술을 공부하고 있다. “너무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 여전히 배움이 즐겁고, 기록이 소중하며, 시작이 두렵지 않다.
그래서 묻는다. 새롭게 무언가를 하고 싶지만 망설이고 있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시간은 소중해요. 지나간다는 걸 너무 잘 아니까, 망설이기보다 그냥 시작하셨으면 좋겠어요. 다시 시작하더라도, 지금 시작하세요.”
“삶은 다큐멘터리예요.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죠”
정신 작가는 자신을 ‘기록하는 사람’이라 말한다. 메모를 하고, 영수증을 모으고, 이름을 남긴다. 그 모든 기록은 감정이 되고, 관계가 되고, 그리고 결국 한 사람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삶은 다큐멘터리 같아요. 가공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가장 인간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는 오늘도 누군가의 이름을 짓고, 메모를 쓰고, 주머니에서 영수증을 꺼낸다.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확고히 묻는다.
“오늘 당신은 어떤 하루를, 어떤 이름으로, 어떤 마음으로 기록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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