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희 국제언어대학원대학교 총장]
의료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된 의대 정원 증원은 문재인 정부에 이어 윤석열 정부에서도 또다시 실패로 끝났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10년간 4000명, 즉 매년 400명씩 완만한 증원을 목표로 했는데도 의료계가 반대했는데, 윤석열 정부는 5년간 1만 명, 즉 매년 2000명씩 급격한 증원을 목표로 제시하면서도 증원 근거와 추계 및 방법 등 어느 것 하나도 명확히 제시하지 않았으니 의료계가 반대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했다.
지난해 2월 19일 정부가 ‘의대 2000명 증원’ 계획을 발표하자 수련병원 전공의 9200여 명이 집단 사직하고, 의대생 1만8000여 명도 집단 휴학했다. 이때 정부가 발령한 보건의료 위기 경보 ‘심각’ 단계를 1년 8개월 만인 지난 10월 20일 해제했다. 이는 지난달 전공의 7984명이 수련병원으로 복귀하여 외래 진료량, 병상 가동률 등이 의정 갈등 이전으로 회복된 데 따른 조치다. 하지만 의정 갈등 기간 동안 임시 조치로 내려진 비대면 진료 전면 확대, 진료 지원(PA) 간호사 도입뿐만 아니라 지역의사제, 필수·공공(이하, 지·필·공) 의료, 의료법 개정, 의료 수가 조정 등 의료개혁의 핵심 과제는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다.
의정 갈등 기간 내내 정부는 사태를 수습하는 데 급급하여 사직한 전공의의 병역 이행, 휴학한 의대생의 학사 운영 등에 미봉책을 동원하다 올해 3월에 2026학년도 의대 정원을 증원 이전(3058명)으로 되돌렸고, 필수 의료 패키지에 포함됐던 정책들도 줄줄이 후퇴함으로써 국민, 정부 및 대학에 커다란 상처만 남겼다. 특히 의료계는 집단 이기주의와 탐욕, 인류애와 봉사정신 부재에 대한 비난을 받으면서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의료개혁은 의료 지역격차를 해소할 지·필·공 의료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 일환으로 의사 증원을 오래 전부터 추진해 왔었는데, 의료계가 이번에도 집단행동으로 저지시킨 것은 히포크라테스 정신을 저버린 행위로서 안타깝다.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에서 의료봉사에 헌신하다 별세한 ‘의사 이태석’과 아프고 병든 사람으로부터 번 돈을 아름답게 사용한 ‘한약사 김장하’에 비하면 의대 학생과 전공의 및 의사협회의 대응은 부끄러운 일이다. 국내 의료진의 집단행동은 자기들의 소득을 지켜내겠다는 저항으로 보일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1년 이상 끌어온 의정 갈등 끝에 서울대 의과대학이 ‘봉사, 배려’를 강조하는 교육과정을 시행한다고 발표한 것은 한 줄기 희망을 던져주는 소식이다.
정은경 보건복지부장관이 지난 9월 22일 기자간담회에서 의료개혁 추진 의지를 밝혔다. “지역의사제를 최대한 빨리 도입”하고, “(의대) 증원이 필요하면 정원을 늘려서 하는 가능성”도 밝히고, 공공분야에 필요한 의사를 양성하는 공공의료 사관학교(공공의대)와 의대가 없는 지역에 국립 의대를 신설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했다. 이런 정책은 단순히 의대 정원 증원을 넘어서는 의료개혁의 큰 틀에서 지·필·공 의료 실현을 목표로 입안되어야 한다.
의료개혁이 성공하려면 정부와 의료계는 다음과 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첫째, 의사들이 집단 이기주의와 탐욕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소득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국세청의 「2014~2022년 귀속 전문직 종사자 업종별 사업소득」자료에 의하면 의사는 평균 사업소득과 중위 사업소득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그 다음 순위에 회계사, 변호사 등이 위치한다. 의사가 전반적으로 고소득 직군이면서, 그중에서도 고소득 진료과목으로 쏠리는 것은 문제다. 위험 부담이 적고 수입이 많은 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이하, 피·안·성)에 지원자가 많고, 위험 부담은 크지만 수입은 상대적으로 적은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이하, 내·외·산·소)에는 지원자가 적다고 한다. 특정 진료과 쏠림을 방지하려면 의료 사고로부터 의사를 보호하도록 법률 개정이 필요하고, 소득이 높은 피·안·성 전공으로 쏠리지 않고 위험도는 높지만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은 내·외·산·소 전공에도 소득이 확보되도록 의료 수가 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의대 교육과정을 보완하여 의대생이 재학 중에 히포크라테스 정신을 체득하도록 해야 한다. 교육부가 지난해 2월 고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의대가 학제를 선택하게 함에 따라 서울대 의대는 지난 9월 16일 예과-본과 구분 없이 통합 6년제로 전환하고 예비의사들에게 공동체 의식과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는 인성교육 과목을 대폭 신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교육받은 의대 졸업생들이 “인류 봉사”와 “환자의 건강과 생명”이 핵심인 소위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진심으로 낭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의정갈등에서 전공의가 수련병원을 떠난 것은 인간을 위한 봉사를 포기하고,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외면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해”를 끼친 행위인 바, 그들이 의대 졸업식에서 맹세한 ‘히포크라테스 선서’ 정신을 되찾기 바란다.
셋째, 의대 입학 전형을 개정하여 의사가 될 품성을 갖춘 학생을 선발해야 한다. 의대 입학 후 교육도 중요하지만, 캐나다와 미국, 영국의 의대처럼 성적이 아무리 우수해도 봉사활동과 지역사회 경험이 부족하면 합격할 수 없도록 입학 전형을 설계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범대학과 교육대학 등 교원양성대학이 입학 전형에서 교직 적·인성 시험을 치르는 것을 참고할 수 있다. 아울러 우수한 인재들이 의대로만 몰리지 않고 이공계 학문과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범정부 차원에서 이공계 육성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새로 추진하는 의료개혁이 반드시 성공하려면 사회적 공감대와 준비도 없이 개문발차(開門發車)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지·필·공 의료 실현 방안, 의료법 개정, 미래 시대를 대비한 비대면 진료와 의료 인력 양성 등 의료계의 과제들에 대하여 전문가 중심으로 공론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리고 세밀하게 준비된 절차에 따라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재희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교육학박사 ▷한국교육개발원 선임연구원 ▷미국 텍사스대(오스틴) 연구교수 ▷한국초등영어교육학회 회장 ▷경인교육대학교 6대 총장 ▷국제언어대학원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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