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초는 10억분의 1초다. 사람이 눈을 한 번 깜박이는 약 0.3초 동안, 시장에서는 약 3억 개의 나노초가 흐른다. 빛조차 이 시간 동안 이동하는 거리는 약 30센티미터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늘날 금융 경쟁은 바로 이 찰나의 시간 차이를 두고 벌어진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2월 15일 보도한 독일 파생상품거래소 유렉스(Eurex)를 둘러싼 논쟁은 이런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보도에 따르면 일부 초고속 매매업체들은 거래소 서버와의 연결을 유지하기 위해 의미 없는 데이터 패킷을 지속적으로 전송하는 방식으로 반응 속도를 앞당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주문을 확정하기 전 신호를 먼저 보내 네트워크 연결을 ‘따뜻하게 유지’함으로써, 실제 주문 시 몇 나노초 빠른 응답을 얻는 구조다.
‘속도 우위’를 둘러싼 회색지대의 확장
과거 금융시장에서 경쟁의 단위는 밀리초였고, 그 이전에는 마이크로초였다. 이제는 그보다 백만 배 더 짧은 나노초가 전장이 됐다. 경쟁은 더 이상 단순한 속도 자랑이 아니라, 네트워크 구조와 물리적 지연, 그리고 규칙 해석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됐다.
이 사례가 던지는 질문은 초고속 매매 업계 내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시간의 단위가 바뀐 시대에, 제도와 행정의 속도는 과연 어디에 와 있는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일본은 ‘규제’가 아니라 ‘조직’을 바꿨다
일본은 최근 이 질문에 비교적 분명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일본 정부는 금융청 조직을 개편해 암호자산과 스테이블코인을 전담하는 부서를 신설하기로 했다. 보험 감독과 자산운용 정책을 담당하는 조직과 함께 디지털 자산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구조다. 이는 규제를 일부 손보는 수준을 넘어, 디지털 자산을 금융 인프라의 일부로 관리하겠다는 행정 체계 재설계에 가깝다.
일본은 이미 법 개정을 통해 은행뿐 아니라 일정 요건을 갖춘 비은행 사업자도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고, 발행·상환·준비금 관리 책임을 명확히 규정해 왔다. 이번 조직 개편은 이런 제도 틀을 실제 행정 운영 단계로 끌어올리려는 조치로 해석된다.
스테이블코인은 ‘허용 여부’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반면 한국의 시계는 상대적으로 더디게 간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논의는 이어지고 있지만, 발행 주체를 은행으로 제한할지 여부, 지분 요건 설정, 해외 스테이블코인의 국내 유통 범위 등 핵심 쟁점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도 예고돼 있으나, 정치 일정과 이해관계가 맞물리며 구체적 방향은 유동적이다.
그 사이 시장은 움직이고 있다. 은행들은 컨소시엄과 실증 사업을 통해 기술 검증을 진행하고 있고, 빅테크와 핀테크 기업들은 결제·송금·콘텐츠를 결합한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제도화 이전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기술과 수요는 회색지대를 따라 진화 중이다. 문제는 이런 방식이 장기적으로 책임 구조와 소비자 보호 측면에서 공백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이다.
WSJ가 전한 ‘나노초 경쟁’의 본질은 단순한 속도 자랑이 아니다. 규칙이 명확하지 않을수록 가장 빠르고 가장 공격적인 참여자가 상대적으로 유리해진다는 점이다. 유렉스 사례처럼 제도가 정의하지 못한 영역은 곧 수익 기회로 전환된다. 규제는 늘 사후적으로 따라붙는다.
스테이블코인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단순한 결제 수단을 넘어 통화 주권, 결제 인프라, 데이터 흐름이 맞물린 영역이다. 따라서 관건은 허용 여부가 아니라 구조 설계의 속도다. 일본이 조직 개편이라는 방식으로 대응에 나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노초는 물리학의 단위이지만, 동시에 정책과 행정의 시험대이기도 하다. 시장은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데, 제도가 여전히 초 단위에 머문다면 그 간극은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비용이 된다.
결국 질문은 다시 나노초로 돌아온다.
눈을 한 번 깜박이는 사이 3억 개의 선택이 오가는 시대에, 한국의 제도는 과연 그 속도를 따라갈 준비가 돼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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