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를 읽고 나니 박건의 감정 상태에 따라 이야기가 전복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득 '류승완 감독님이 이렇게 좋은 역할을 왜 내게 주셨지?' 싶더라고요."
영화 '휴민트'는 비밀도, 진실도 차가운 얼음 바다에 수장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이들이 격돌하는 이야기. 류승완 감독과 박정민이 '밀수'에 이어 두 번째로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사실 '밀수' 무대인사를 할 때였는데요. 감독님께서 액션 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시기에 좋게 생각한다고 답했죠. '휴민트'라는 영화를 만들 건데 생각이 있냐고 하셔서 당연히 있다고 했고요. 사전에는 그 정도 대화만 나눴어요."
"남자다운 역할이고 액션도 많으니 준비를 어느 정도 해놔야 한다고 하셔서 체육관에 다니며 몸을 만들고 있었죠. 감독님께서는 박건이라는 인물이 멋있으면 좋겠다고 하셨고 저 역시도 그랬어요. 사실 촬영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자아도취하기 마련이잖아요. 나 외에는 이 인물을 할 수 없으니까 인물과 나 자신을 굉장히 붙여놓게 되거든요. 그런데 '휴민트'는 한편으론 두려웠어요. 완성된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박건과 박정민의 거리감이 너무 멀어서 제 눈에 오그라들지 않을까 염려했거든요. 다행히 영화를 보고 나니 그렇게까지 기시감이 들지 않아 감사했고 어색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어요."
류승완 감독과 제작사 외유내강을 향한 깊은 신뢰는 그를 다시 한번 뜨거운 현장으로 이끌었다.
"류승완 감독님이 부르시면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제가 20대 때, 아무것도 아닐 때도 중요한 역할을 주시며 믿어주셨잖아요. 그런 분에게 마음이 조금 더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제작사 외유내강과 함께한 작품 중에 실망스러운 결과물도 없었고요."
박건은 말보다 침묵으로 그리고 절제된 감정으로 관객과 소통한다. 그는 갈등을 몰랐던 인물이 신념과 개인의 감정 사이에서 흔들리기 시작할 때의 고독에 집중했다.
"박건은 갈등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이 처음으로 갈등하기 시작하는 인물 같아요. 단 한 번도 자기 신념과 개인의 감정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았던 사람이 갈등을 시작할 때 느끼는 감정에 대해 생각했죠. 결국 무언가를 선택하다가 비극을 맞게 되는 인물이라고요. 참고한 영화는 엄청 많아요. 류승완 감독님은 USB에 영화를 담아주시거나 DVD를 빌려주시곤 하거든요. 그 안에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같은 작품도 있었고 홍콩 영화들도 있었어요. 그런 영화들을 보면서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죠. 저는 주윤발이 아니니까요. 하하."
치열한 액션 현장에서 때로는 몸과 마음이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다. 러시아 보스와의 격전지였던 좁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는 유독 힘겨운 고비를 겪어야 했다.
"러시아 보스와 2대 1로 싸우는 액션 장면이었어요. 액션 자체가 힘든 건 아니었는데 우리를 가두는 환경이 너무 열악했죠. 그 공간이 처음도 아니었거든요. 영화 '하얼빈' 때 조우진 선배님과 술집 장면을 찍었던 곳인데 왜 그렇게 멘털이 나갔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이유도 모른 채 두 시간 정도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짓을 하고 있었죠. 근래 저 자신에게 가장 실망했던 순간이었어요. 아예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고요. 감독님을 비롯해 많은 분이 지켜보고 있는데 쉬운 장면에서 애를 먹으니 정말 힘들었죠.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못하고 혼자 숙소로 돌아왔던 기억이 나요."
무너진 순간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동료들의 섬세한 시선이었다. 고독한 싸움이 될 뻔한 현장에서 감독의 배려는 큰 힘이 되었다.
"누군가 '얘가 무너졌구나'라는 걸 인지만 해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아요.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이 되면 저도 계속 고꾸라지게 되거든요. 다행히 이번에는 류승완 감독님이 '얘가 평소답지 않은데'라는 걸 느끼셔서 빨리 머리끄덩이 잡고 일으켜 주셨어요. 늘 그런 사람이 곁에 있는 건 아니잖아요. 촬영이 항상 순조로운 것도 아니고요. 보통 촬영은 늘 고비가 있죠. 그때 혼자 헤쳐나갈 때도 있고 동료나 감독님이 도와줄 때도 있지만 누군가 그 상태를 알아봐 줘야 가능한 일 같아요."
채선화와의 관계 역시 겉으로 드러나는 대사보다는 숨겨진 전사와 미세한 떨림으로 완성됐다. 두 배우는 카메라 뒤에서 공유한 그들만의 기억을 연기에 녹여냈다.
"박건과 채선화가 영화 속에서 하는 행동 중에 우리끼리만 전사를 두고 생각한 게 있었어요. 예를 들어 무릎베개를 하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행동은 과거 두 사람이 사랑할 때 했던 모습이고 동시에 마지막 순간에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죠. 관객분들이 꼭 알아주실 필요는 없지만 우리끼리 그런 전사를 공유하고 있으면 연기에 큰 도움이 돼요. 박건이 핸드폰 속 녹음된 채선화의 목소리를 들을 때도 그래요. 함께 녹음된 박건의 말투가 지금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목소리와는 다르거든요. 사랑했던 순수한 시절에는 지금처럼 폭력적인 인간은 아니었을 거예요. 인간이 변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게 됐고, 이별하면 그 사람이 그립기도 하지만 함께 보냈던 시간 때문에 괴롭기도 하잖아요. 채선화와 동시에 그 기억이 물밀듯이 찾아왔을 것 같아요. 싫어서 헤어진 게 아니니 다시 뭔가를 부여잡아 보고 싶었겠지만 결국 실패하고 마는 선택들이 꼬이며 벌어지는 사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직설적인 애정 표현이나 신체 접촉 대신, 박건은 시선과 온도로 채선화를 품었다. 명분 없는 스킨십보다는 그 인물다운 방식의 애틋함을 선택한 결과다.
"명분 없는 스킨십은 박건을 더 힘들게 했을 것 같아요. 박건답지 않았을 것 같고요. 저도 고민을 안 한 건 아니예요. '아리랑' 뒷골목에서 만났을 때 손이라도 한번 잡아야 하나 싶었죠. 하지만 명분과 목적이 없는 행동은 어색해요. '손을 너무 잡고 싶어'라고 생각할 때와 '잡으면 애절해 보일까'라고 생각할 때는 무드가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리허설 때 다가가려다 어색해져서 포기했던 기억이 나요. 박건은 그 자리에 그냥 서 있는 사람이어야 더 박건스럽겠다고 판단했죠."
박정민에게 '휴민트'는 고전적인 첩보물의 매력과 감정적인 액션이 결합된 새로운 시도로 남았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향한 연정을 동력 삼아 움직이는 인물을 연기한 그는 홀가분한 미소를 지었다.
"류승완 감독님이 좀 더 고전적인 색채의 첩보 액션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게 참 잘 구현된 것 같아요. 촬영과 조명 감독님도 애를 많이 써주셨고요. 초반 모니터링 때부터 감독님 영화 중에 이런 영화는 처음 본 것 같다고 말씀드렸죠. 감정적인 액션이 녹아있어 재미있는 시도였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처음으로 사랑하는 이성을 목표로 하는 인물을 연기해 본 것 같아요. 만족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예쁘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제 눈에는 막 엄청 이상해 보이지는 않아서 '그럼 됐다' 하고 혼자 위로하고 있습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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